중문 색달 해변과 바다 위 요트, 주상절리와 작은 포구들이 있는 길.
“혼자 왔어?”
“네?”
“혼자 왔냐고”
“아.. 네...”
“왜 혼자 다녀. 둘이 안 다니고”
“아... 네....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요”
“어디까지가? 끝까지가?”
“네. 대평리까지요...”
“혼자 가려면 쓸쓸하겠네.... 다음엔 꼭 둘이 와”
“네....”
제주의 할머니들은 처음엔 투박하다. 하지만 몇 마디만 주고받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처음 본 올레꾼이지만 정 많은 할머니의 마음은 속일 수는 없는 듯하다.
온화하고 바람 적은 마을 '월평리'
8코스를 시작하는 월평리에는 길을 걷기 전 대부분의 올레꾼들이 들르게 되는 조그만 가게가 있다. 올레길 시작점에 있는 ‘송이 슈퍼’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관광지처럼 특별한 무엇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송이 슈퍼’라는 문구와 지금은 없어진 옛날 전화번호가 흐릿하게 적힌 낡은 간판이 왠지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마다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초콜릿을 사든 음료수를 사든 무언가를 사기 위해 들르곤 한다. 가정집 느낌이 드는 가게 안은 작은 가판대 위에 단촐하게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어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이 있다. '송이'는 이집 주인의 따님일 것이라고 예상은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예전에는 7코스 종점과 8코스 시작 스탬프를 관리해 주었던 고마운 슈퍼이다.
송이 슈퍼가 있는 월평리는 버스가 드문드문 있는 조그만 동네이다. 길을 떠나려는 올레꾼에게 어느 어르신께서 동네 자랑을 하신다. 이곳은 공기가 너무 좋고 사람들 인심이 좋아 몇 년 전 서울에서 지병이 있던 사람이 여행을 와 며칠 민박을 하며 지내다가 동네가 너무 좋아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몸도 많이 좋아졌고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제주는 바람이 많기로 유명한데 이곳은 지리적 조건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바람이 적어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한라봉, 파인애플 같은 화훼작물들을 많이 재배한다. 올레 리본을 따라 동네를 걷다 보면 많은 비닐하우스를 볼 수 있다.
“제주에 이렇게 커다란 사찰이 있었나?”
'약천사'
월평마을에서 시작한 길은 마을을 지나 걷다 보면 커다란 사찰을 만난다. “제주에 이렇게 커다란 사찰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고 웅장한 지상 30 m 높이의 사찰인 '약천사'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물이 솟는 샘물과 사철 흐르는 약수가 있는 연못이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단일 사찰로는 동양 최대의 대웅전인 '대적광전'이 있고 법당 앞 종각에는 무게가 18톤이나 되는 범종이 걸려 있다. 워낙 사찰 규모가 크다 보니 주변이 공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다.
큰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 모습이 웅장하다. 넓은 법당 안 큰 부처님을 바라보며 삼배를 올리고 마음을 비워 본다. 법당 안은 동양 최대의 대웅전 답게 커다란 기둥 네 개가 있고 법당 양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층계가 있다.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회랑(사원에서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에 반짝반짝 빛나는 똑같은 자세 똑같은 모습의 황금색 8만 부처님들이 모셔져 있다. 계단을 더 올라 3층으로 올라 가니 불자들이 올린 등들이 걸려 있다. 모두 그들 가족의 안녕과 자신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달았으리라. 높은 곳에서 법당 안을 보니 부처님 얼굴이 정면으로 가깝게 보인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부처님의 얼굴과 같은 높이에서 정면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당신은 왜 여행을 하나요?
작은 포구에서의 깨달음
약천사를 나와 마늘밭을 지나며 걷다 보니 조그만 포구가 나온다. 작은 배들과 식당들이 있는 '대포 포구'이다. 유별나게 멋있는 관광지는 아니지만 나름의 규칙과 순서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바다 냄새와 파도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여유롭고 조용한 한가로운 포구이다.
여행을 하는 많은 이유 중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함도 그중 하나 일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며 정리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여행을 하며 느끼는 감성들이 마음을 여유롭고 너그럽게 만들어 마음에 담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극복하게 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이쁜 꽃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마음에 두고 있던 고민이 스쳐 지나듯 생각나고 결국 내면의 갈등과 고민은 내 안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문제를 해결할 것도 정리할 것도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긍정적으로 되어 도로에서 어떤 차가 내차를 위험하게 추월한다 해도 '아!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보구나. 급하면 빠르게 갈 수 도 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화가 나는 일도, 육두문자가 나오는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게 된다. 이처럼 세상을 긍정적이고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행의 힘이다.
전봇대의 전깃줄 위에서 새들이 나란히 앉아 재잘대고 있다. 새들의 지저귐은 포구의 적막함을 더욱 운치 있고 여유롭게 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포구를 바라보니 마음이 온화해지고 차분해진다. 꾸미지 않고 살아가는 삶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이런 것이 걸으며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햇볕을 머금은 너른 바다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대포포구의 고즈넉함을 뒤로 하고 중문 축구단지를 지나니 멀리 바다 위로 여유롭게 요트가 떠 가고 있다. 반짝반짝 햇빛을 머금은 너른 바다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물 위로 반짝이는 햇빛이 없었다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을 못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보았던 외국의 유명한 풍경이 부럽지 않은 너무나 매력적인 풍경이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데 어디 이 풍경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사진 속에 그 풍경을 담을 뿐이다.
바다를 보며 올레 리본을 따라가니 제주의 유명 관광지인 '주상절리'가 나온다. 산골짜기에서 살다가 화려한 도심으로 나온 것처럼 지금까지의 한적했던 길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한국 사람보다는 중국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도 주상절리의 모습이 많이 신기한가 보다.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정신들이 없다. 얼떨결에 나도 어느 커플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식을 때 수축작용에 의해 생긴 수직의 돌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틈이다. 가까이서 볼 수는 없지만 짓 푸른 바닷물이 주상절리와 부딪치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켜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신기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올레길은 주상절리 밖으로 길을 안내하고 있기 때문에 주상절리를 보려면 매표를 하고 안으로 들어 가서 보아야 한다.
주상절리를 지나 컨벤션 센터를 지나면 한옥 형태로 지어진 씨에스 호텔을 지나게 된다. 많은 올레꾼들의 발길이 닿게 되면 호텔 영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고맙게도 호텔 안으로 지나도록 길을 내준 고마운 호텔이다.
호텔 직원분이 지나가던 올레꾼에게 바다가 보이는 벤치를 가리키며 힘들면 쉬었다 가도 된다며 웃는 얼굴로 친절히 안내를 한다. 직원분은 자신도 올레길을 걸어 보았는데 너무 좋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코스씩 걷는 다고 한다. 운동도 되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몰랐던 제주의 속살을 그대로 느끼고 알게 되어 호텔에 묵는 사람들에게 안내도 하고 길 추천도 한다고 한다.
머리를 비울 것도
마음을 다스릴 것도 없다.
8코스에서는 오름을 한 곳 오른다. 오름 입구의 잘 정돈된 데크길을 따라 출발하면 정상을 지나 오름 둘레를 돌아 다시 입구로 오게 되는 '베릿내 오름'이다. 초반은 가파르지만 정상에 오르게 되면 연인 같기도 하고 형제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자매 같기도 한 나무 두 구루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다. 그곳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니 중문 앞바다와 중문 관광단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한라산도 보인다. 이 곳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높이가 낮음에도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제주 오름이 주는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 올레꾼이 다가가도 날아갈 생각을 않고 사진을 찍어도 가만히 앉아만 있다.
정상에서 한숨을 돌린 후 다시 길을 걸으며 작은 사찰도 지나고 중문천도 지난다. 중문천의 물은 상류의 천제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흐르고 중문천 주변은 공원처럼 조성이 되어 있어 산책하기가 좋게 되어 있다. 올레길을 걷다 이렇게 잘 꾸며진 제주의 공원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오름을 돌아 다시 입구로 오면 길은 중문 색달 해변으로 이어진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해녀 할머니들이 직접 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파는 곳이 나온다. 멍게와 해삼 한 접시를 할머니께 달라고 하니 혼자 왔냐고 물어보시곤 대평리까지 가냐고 물어보신다. 많은 올레꾼들을 만나시다 보니 8코스 끝이 어디인지 아시는 것 같다. 그리고 혼자 걷는 것이 쓸쓸해 보였는지 다음에는 꼭 둘이 오라 하신다. '네~~' 하고 웃으며 대답하고 다음에도 꼭 다시 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빙그레 웃으신다. 무뚝뚝하게 보였던 할머니의 표정이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뀌셨다. 할머니의 웃음과 오고 가는 대화에서 다정하신 제주 할머니의 정이 느껴진다.
중문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고급 호텔들이 즐비한 숙박시설이 많은 곳이다. 예전 올레길을 알기 전 '쉬리의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중문 색달해변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해변을 걸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멀리 쉬리의 언덕을 보며 아름다운 해변을 걷는다. 앞서 걸었던 누군가의 발자국도 있고 지금 걷고 있는 나의 발자국도 해변을 따라 남아 있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 자국들을 지우려 하지만 올레꾼의 아쉬운 마음을 아는 듯 급하지 않게 여운을 남기며 조금씩 조금씩 지우고 있다.
길은 점점 해변 끝에 이르고 등을 돌려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본다. 풍경은 길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더 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앞으로 갈길만 바라보지 말고 내가 걸어왔던 길도 돌아보자. 그럼 그곳엔 생각지 못했던 풍경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걸어왔던 흔적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머리를 비울 것도 마음을 다스릴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저 좋다는 생각뿐이다.
제주는 해마다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힘들게 개척하고 만들어 놓은 올레길 들이 망가 지곤 한다. 특히 바닷길을 걷는 구간에서는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길들이 유실되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게 돼버리곤 한다. 그래서 본래 8코스는 하얏트 호텔을 지나 갯깍 주상절리대와 해병대 길을 걷게 되어 있었으나 낙석의 위험이 있어 불가피하게 중문 관광단지로 우회하여 예래 생태 공원을 지나 본래 코스인 논짓물로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갯깍 주상절리와 해병대 길은 지금은 통제가 되어 갈 수가 없는 길이다. 지금은 비록 갈 수 없는 길이 되었지만 예전에 걸었던 기억으로 적어 보려 한다.
지금은 걸을 수 없는 길
갯깍 주상절리와 해병대 길.
하얏트 호텔을 지나니 갯깍 주상절리대가 나온다. 아까 전에 멀리서만 보았던 주상절리의 절벽 밑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의 압도적인 높이와 경사는 걷는 이의 마음을 조금은 두렵게 하지만 절경 앞에서 포기란 있을 수 없다. 발 디딜곳에 집중을 하며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걷다 보니 조그만 동굴 같은 곳이 나온다. 예전 노비를 쫓는 '추노'라는 프로의 촬영 장소이다. 동굴은 끝이 막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바다 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통로처럼 뚫려 있는 형태로 제주에서는 이런 굴을 '들렁궤'라고 부른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늑한 느낌이 든다. 물이 나가는 입구에 앉아 바다를 보니 더욱 운치 있게 보인다. 이곳은 서귀포 향토 유산으로도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주상절리 아래로 신경 쓰며 걷던 길을 지나고 나니 널찍널찍한 돌로 평평하게 잘 다듬어진 길이 나온다. 길 입구에는 빨간색 바탕에 '해병대 길'이라고 적인 비석이 서 있다. 이 길은 제주올레에서 8코스를 처음 만들 당시 제주에 주둔 중인 해병대원들의 도움을 빌어 3일 동안 작업을 하여 만들어진 길이다. 올레꾼뿐만 아니라 해녀 할머니들도 이용하는 고마운 길이다. 이렇게 올레길에는 여러 다양한 사연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길 외에도 14코스의 특전사 길이 있고 4코스에도 해병대 길이 있다.
지금까지의 갯깍 주상절리대 길과 해병대 길은 이제 걸을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안전이 우선이므로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우회하며 만나는 새로운 길
'예례 생태 공원'
갯깍 주상절리대 낙석의 위험으로 길이 통제가 되고 제주올레에서는 새로운 길을 내었다. 중문 관광단지를 통과하여 예례 생태공원을 지나 본래의 길인 논짓물로 길은 이어진다. 이 길은 내가 마지막으로 8코스를 찾아왔을 때 걸었던 길임에도 예전의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그런지 중문 관광단지를 걷는 길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진다. 더욱이 주변을 찍었던 사진도 거의 없다. 깨끗하고 반듯하게 잘 정돈된 관광단지의 길이지만 왠지 정감은 가지 않는다. 여미지 식물원을 지나고 중문 관광단지 교차로에서 길은 예례동 방향으로 이어지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지루했던 올레꾼의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물과 초록이 있는 널따란 공원이 나온다.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군데군데 공사했던 흔적들이 있지만 중앙을 흐르는 대왕수천을 따라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은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상쾌한 공기와 분위기는 다른 도시의 공원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중국 관광객들이 제주를 방문하는 이유중 첫 번째가 깨끗한 공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런 이유를 충분히 대변하는 공원이다.
갈지자 길의 여유로움
'논짓물'
예례 생태 공원을 나오면 이제 길은 '논짓물'로 이어진다. 논짓물은 풀장같이 물을 막아 놓은 곳인데 이곳의 물은 땅속에서 나오는 민물인 용천수와 바닷물이 섞인 물이다. 수심은 1m가 넘지 않으며 바다를 보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여름에 이 길을 걷는 다면 이 곳에서 물놀이를 하며 한 낮의 더위를 피해 갈 수도 있다.
이제 길은 지그재그 갈지자로 이어져 가며 해안도로를 걷는다. 길 옆으로 정렬되어 있는 돌들을 보니 이 길을 만든 사람들의 노고가 보인다. 왼쪽으로는 등대가 있는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그리고 콘크리트로 된 바닥에는 채 굳기도 전에 바다새가 총총총 걸어간 발자국이 남아 있다. 남겨진 자욱을 보니 바다새의 발에 아직 굳지 않은 콘크리트가 묻었을 것인데... 하늘 높이 잘 날아갈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어느 해 인가 이 길을 걷는데 누군가 벤치에 홀로 앉아 바다를 보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변 펜션에 묵는 사람인 듯했다. 길을 걷는 올레꾼 눈에는 너무나도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많은 관광지를 동서남북 빠르게 차 만타고 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한 곳에 머물며 느긋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여행의 방법은 개인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끔은 새로운 스타일로 바꿔 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보며 해안도로를 걷다 보니 아담하며 아름다운 포구인 하예포구의 하얀 등대가 보인다. 바다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보니 이제 대평리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다리는 조금 아프지만 마음은 점점 서운한 감정이 올라온다. 마지막이 가까워 오면 그동안의 과정들이 생각나며 아쉽게 느껴지는 것처럼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이쯤에서 느끼는 것은 너무 빨리 걸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종점이 가까워 올수록 일부러 해찰을 떨며 천천히 걷게 된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지금 걷는 이 길이 다시 보지 못할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는 생각에 점점 아쉬운 마음이 밀려온다.
멀리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떠있다. " 아! 왜 저렇게 이쁜 거야... 가슴 아프게..." 햇빛에 비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풍경이 너무 이뻐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속도보다 걸음을 늦추며 한걸음 한걸음 터벅터벅 천천히 걷는다.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난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대평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대평리가 가까워 온다. 산방산과 박수기정이 아름답게 구도를 이루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용왕 난드르 마을인 대평 포구가 나오고 등대도 보일 것이다. 대평리는 내가 좋아하는 제주의 마을 중의 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8코스를 마치게 되는 올레꾼의 마음은 더욱 아쉽기만 하다.
대평리를 병품처럼 품고 있는 박수기정이 점점 눈 앞에 가까이 오며 8코스 여정은 끝이 난다. 흐릿한 바다 저 너머로 산방산과 형제섬이 보인다. 형제섬 앞에는 배 한 척이 지나가고 빨간 등대와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방파제 앞에는 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다. 멋있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온화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이 온화해지고 그것들을 잊지 않으려 그 모습들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는다.
대평리는 항상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그래서 더욱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몇 개의 카페가 있다. 마지막으로 어느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오늘의 여정을 기억해 본다. 버스 시간이 다가 오지만 쉽사리 자리를 뜨기가 힘들다. 눈에 스쳐 지나갔던 들에 핀 이름 모를 꽃들, 하늘을 날던 새, 반짝이던 바다, 제주 할머니의 정과 아름다운 해변길, 그리고 조용한 마을 대평리.
난 그렇게 몇 대의 버스를 지나 보내며,
한참 동안이나 카페에 앉아 대평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