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이 활짝 열리는 길, 제주올레 5코스

꽃들이 흩날리는 봄 속을 행복에 묻혀 걷는 길. 제주올레 5코스

by Ollein


금빛 바다와 존재의 집



어느 봄날의 남원 포구.


동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봄볕에 금빛으로 물들여지고 있는 바다. 그 빛의 기운으로 밤새 외로웠던 대는 지난밤의 고단함을 털어내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아침 포구의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아니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나의 시선은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멈추어 다. 그런 황홀한 풍경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서게 되는 길. 제주올레의 다섯 번째 길이다.


올레 5코스는 남원포구에서 시작하여 쇠소깍까지 이어진다.


조용한 포구에서 바다를 따라 시작되는 길. 하지만 길가에서 마주한 법정 스님의 말씀에 이내 걸음이 멈추어진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 법정 스님의 '잠언 시집'에서.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고 뱉지 않으려 해도 뱉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말. 사방에 떠도는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배려 없이 내뱉는 말 때문에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스님은 '존재의 집'이라 하시며 그 집 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라고 하셨다.


생활 속에서의 일상적인 대화들. 그리고 글이 말이 되는 SNS로 소통하는 요즘의 세상. 그 속에서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 혹은 한 번도 얼굴을 대한적 없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서 내 존재의 집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본다. 오늘 걷는 길을 더욱 의미 깊게 하는 말씀이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아름다운 산책로


온몸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던 살이 환한 빛으로 가리키는 산책로. 작은 입구에서 시작되는 이곳은, 유명 관광지처럼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라 불려지는 '큰엉 경승지 산책로'이다. 큰엉은 큰 바위가 바다를 집어삼킬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산책로 옆 바다 쪽으로는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절벽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산책로에 들어서니 빛들은 나무들 틈새로 듬성듬성 길을 비추고,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봄내음은 온몸의 감각들을 살아나게 한다. 거기에 가려진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맑게 들려오는 새소리는 상쾌한 기분을 그대로 전해주며 걷는 내내 신선함을 주고 있다. 때 묻지 않은 가장 자연적인 모습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뜻하지 않은 감동이 밀려온다.



잠시 걷다 만나는 전망대.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절벽과 길을 시작하며 넋을 잃게 했던 바다가 다시 눈 앞에 펼쳐진다. 금빛 물결 속에 있던 대는 이제는 옥빛으로 변한 바다 한가운데 서서 “그곳에선 내가 잘 보이나요? 나는 당신이 잘 보여요” 하며 나에게 안부를 보내고 있다. 길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계절의 변화는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깨어나게 한다. 그래서인지 전망대 아래 갯바위에는 이른 아침 봄을 느끼며 바다를 향해 긴 대를 드리우는 낚시꾼이 보인다. 고기가 잡히지 않을들 무슨 걱정이 있으랴? 무엇을 낚을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새로운 계절을 느끼며 너른 바다를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자연의 변화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은 계절. 그래서 봄은 좋다.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본다. 코 끝에 닿는 포근한 바람이 봄내를 터트리며 온몸으로 퍼져 나의 오감을 활짝 열리게 한다. 그런 봄의 태동을 꽃들도 눈치챘나 보다. 모든 것을 보여 주려는 듯 하얀 들꽃이 돌 틈 사이에 앙증맞게 피어 올라 올레 이정표 곁에서 생명을 틔우고 있다. 힘든 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몰려오며,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괜스레 마음이 두둥실 하다. 이래서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라 했나 보다. 은은 하지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힘. 그리고 그 힘을 만끽하는 우리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큰 축복을 받은 기분이다.



아름다운 산책로쌩하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웠을까? 엄마와 아이가 자전거를 끌며 산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걸어가는 길 끝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명한 모양의 한반도 숲. 하늘색 옥빛 바다와 그 위에 펼쳐진 하얀 하늘이 숲의 초록과 대비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길 사이로 엄마와 아이는 아름다운 봄길의 풍경이 되어 버린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굳이 수식어가 필요 없는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한가로운 봄날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걷는 것이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참 탐스럽고 이쁘기도 하다


마당에 새소리와 따스한 봄 볕만이 비추고 있는 조용하고 인 없는 마을. 너무 조용해 걷는 걸음마저 조심스러워 발끝의 힘을 살짝 실으며 걷다 만난 마을 안쪽 어느 집 담장. 추운 겨울을 견딘 담쟁이가 새싹을 틔우려는 듯 봄 채비를 하고 있다. 파란색 지붕 위에 떨어진 동백의 잎들이 빨리 싹을 틔우라 하며 담쟁이를 재촉다. 그 재촉에 초록의 새싹들이 벽을 덮으면 봄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여운은 더욱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마을 회관처럼 보이는 건물에는 주황색 지붕보다 높이 확성기가 서있다.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는 확성기. 그 아래 새겨진 낯익은 구호는 오래전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의 나처럼 젊었던 시절에 지어졌음을 알려주고, 이젠 세월이 흘러 저 건물을 지었던 젊은이들은 우리들의 당신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우리들은 다시 저 확성기처럼 높고 넓게 펴져 갈 희망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고 있다. 때론 힘들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희망이라는 의지의 약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마을을 지나, 바다를 향해 . 그 끝에 예쁘장하고 곱게 장식된 나무가 나를 반다. 바다가 보이는 길과 그 길 끝에 서있는 나무 한그루. 탐스럽고 이쁘기도 하다. 누군가의 정성과 배려각각의 풍경들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낸 하나의 풍경. 탐스러운 나무 아래에는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날리고 있는 올레 리본이 "이쪽으로 오세요" 며 나를 이끌고 있다. 나무를 가꾼 이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 마음 같은 이쁜 풍경에 잔한 미소가 번진다.


탐스럽고 이쁜 나무 아래에서 올레리본이 날 부르고 있다


이제 올레꾼은 위미의 동백나무 군락지로 들어선다. 본격적인 계절이 지나서인지 추운 바람을 맞으며 겨울에 피었던 동백은 보이지 않고 푸른 잎들만 남아 있다. 하지만 올레꾼의 서운한 마음을 알았는지 몇 송이의 동백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 준다.


이곳의 동백나무 군락지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 마을에 사셨던 현맹춘 할머니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할머니는 17세 되던 해 이 마을로 시집을 왔고 마을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품팔이를 하여 모은 돈으로 황무지를 사들여 한라산의 동백씨앗을 뿌려 바람을 막아줄 울창한 숲을 만들게 되었다. 추운 바람을 이기며 피고, 송이채 땅에 떨어져도 한동안 그 색을 발하지 않는 동백은 거센 제주의 바람을 막아주며 할머니와 함께 하였고 고맙게도 오늘날까지 이어주고 있다.



꽃들이 있는 한가하고 호젓한 봄날


동백나무 숲을 지나 해변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포구가 보인다. 여느 포구처럼 한가하고 고즈넉하다. 작은 배 한 척이 떠있고 잠시 쉬어가려는 듯 그 너머 한라산 정상에는 구름이 느긋하게 누워 있다. 구름도 쉬어가니 올레꾼도 쉬어가려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 위미리로 들어선다.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봄의 전령인 벚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소담지게 만개한 꽃들은 당장이라도 하얀 꽃가루를 뿌릴 채비를 하며 올레꾼을 맞아주고 있다. 꽃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점점 꽃들 속에 묻히며 콧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달달다. 이제 내 마음엔 완전히 봄이 온 것 같다.


위미리


동백의 색은 참 묘하게 매력적이다. 빨간색이라 해야 할지 분홍색이라 해야 할지 모를 농익은 붉은빛은 김유정의 '봄봄'에서 나오는 '나와 점순이'의 애정 같은 순수한 사랑의 빛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파리의 에펠탑 아래에 샛 노란 원피스를 입고 서있는 어느 여인의 가느다란 손에 들려있는 토트백의 색 같기도 하다.


걸음을 멈추고 어느 집 정원에 피어있는 동백의 붉은 송이를 바라본다. 찬바람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나는 늘 그곳 그 자리에서 당신을 위해 붉게 빛나고 있다며 시크하게 자신의 빛을 뽐내고 있다.


동백나무 옆에는 주황 미깡들이 자신들의 색을 발하며 누구 색이 더 고운지 대보자는 듯 동백에 기웃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붉은빛에 시샘을 부리듯 날보고 누구 빛이 더 고운지 선택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에는 동백의 붉은빛이 들어와 버렸다. 미깡에게는 미안 하지만, 그 빛은 한동안 내 마음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에도 불구하고 동백의 이쁜 빛과, 미깡의 고운 색도 누구네 집 흰둥이의 마음을 빼앗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봄 볕이 잘 드는 길가에 올레꾼이 지나가도 모를 만큼 무심한 흰둥이가 길가에 납작 엎드려 낮잠을 즐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스하게 비추는 한가로운 봄 볕을 참기가 힘들었나 보다.



길 옆 담벼락에 핀 유채는 제주의 봄 자신이 빠질 수 없다샛노랗게 꽃을 피워 나 좀 바라봐 달라며 한 것 멋을 내고 있다. 꽃을 바라보니 춘삼월 두근두근 설레는 봄처 마음처럼 괜스레 올레꾼 마음도 울렁거리며 마음속에 있던 동백의 붉은빛과 섞여 버리고 만다. 투명한 노란빛이 너무 이뻐 사진에 담아보지만, 두근거리는 마음까지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름 없는 찻집의 주인은 황토색 꽃병에 유채를 한 아름 담아 거뭇한 돌담 앞에 놓아두었다. 올레꾼을 바라보며 하늘거리는 꽃의 손짓에 그냥은 지나칠 향긋한 커피로 봄의 여유를 즐겨보려 문을 노크해본다. 하지만 인기척도, 대답도 없고 주인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봄 풍경을 감상하며 봄 볕에 취했있나 보다. 아쉬운 올레꾼의 마음을 달래 주듯 꽃병에 담긴 유채만이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아리고, 아련했던 추억


세월이 지나고 새로운 사랑이 오면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시작됐던 계절이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 사람보단, 서로를 바라보며 설레고 두근거렸던 마음이 더욱 그립고 생각나는 첫사랑.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의 추억을 느끼게 해주었던 영화, 건축학 개론의 촬영지였던 '서연의 집'에 들어선다.


카페 밖 먼 바다를 바라보니 영화 속 풋풋했던 두 남녀 주인공이 생각난다. 이룰 수 없던 사랑이었고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이 있었기에 태어나 처음으로 상은 아름답다고 느꼈던 남녀. 하지만 서투른 사랑 때문에 이별이 이별 인지도 모른 체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잊혀졌던 기억.


먼 훗날 다시 만났지만, 지나간 세월은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사랑을 서먹하게 하였고, 그래서 그렇게, 그저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던 두 사람.


렇게 첫사랑은 동백 붉은빛처럼 아리고, 유채의 노란빛처럼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며 되돌릴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했던 기억 때문일까? 어느 노래의 가삿말이 생각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 노래 '걱정 말아요 그대' 중.


잠시 차 한잔을 주문하고 창문 너머 바다를 바라본다.


카페 밖에연인들이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담고 있다. 봄바람에 실려오는 바다 냄새에 가슴이 설레는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사랑의 눈짓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봄은 연인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전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용천수와 검은 모레


제주에는 용천수가 흐르는 곳이 많다. 용천수는 제주의 마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래서 용천수에서 나오는 물의 양에 따라 마을의 크기도 결정이 되었다. 그래서 서귀포 권역의 바다를 지나다 보면 용천수가 솟아 나오는 마을에서는 주변에는 물을 받아 목욕을 할 수 있는 노천탕을 만들어 놓았다.


5코스 중 지나게 되는 '넙빌레' 용천수가 나오는 곳 중 한 곳이다. '빌레'는 용암이 흐르면서 비교적 평평하게 쌓인 지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바다와 근접하여 용천수가 흐르는 길목에 물을 가두어 벽돌로 주변을 낮은 담장처럼 쌓아 야외 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남탕과 여탕은 구분이 되어 있고 여름에는 시원한 용천수에 몸을 담그며 피서를 즐기기도 한다. 한여름에 5코스를 걷는다면 아침 일찍 길을 시작하여 무더위가 절정인 한낮에는 용천수에서 잠시 쉬었다가 태양빛이 덜한 오후에 다시 길을 시작해도 좋은 방법이다.


넙빌레를 지나니 이제 길은 한적한 바닷길로 이어진다. 아침에 보았던 해는 바다에 반짝반짝 수를 놓으며 살금살금 올레꾼을 따라오고 있다. 수면 위로 살짝 솟아오른 작은 바위에 바다새 한쌍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분명 금슬 좋은 부부 새 일 것이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마을 중간에 올레 쉼터가 있다. 모든 코스에 있는 것은 아니고 몇몇 코스에 마을을 지나는 올레꾼들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마련된 공간이다.


올레 5코스에도 신례리의 공천포에 쉼터가 있다.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자리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으며 커피, 물, 화장실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쉼터 밖에도 쉬어갈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있고 그 아래 시원한 그늘에는 올레꾼을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나무 그늘 밑 쉼터에 앉으니 검은 모래가 깔려 있는 해변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하늘에는 올레꾼을 따라 쉬어 가듯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장기를 두고 있었는지 널따란 돌 위에 장기판이 놓여 있다. 마을을 지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인심 좋은 선한 사람들의 배려가 느껴져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되는 곳. 그래서일까? 낯설지 않은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며 이 섬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공천포는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검은 모래 해변은 화산이 있던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모래가 마치 커피의 원두를 갈아 놓은 듯 검고 부드럽다. 여름이면 근처 해수욕장에서 검은 모래찜질을 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복이 많은 것 같다. 해외에서는 이런 검은 모래 해변이 드물어 굉장히 신기한 풍경이라고 하는데 그런 곳을 제주에서는 항상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땅인가?


공천포 해변


스치는 인연도 소중하다


공천포를 지나 만나는 또 다른 포구인 망장포는 제주에 남아있는 포구 가운데 유일하게 옛날 포구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포구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말, 세금으로 거둔 물자와 말을 원나라로 보내던 포구로 이 지역에 그물을 많이 친다고 해서 '망장포'로 불려졌다. 포구로 들어오는 입구가 좁아 보이는 것이 그리 크지 않은 배들이 오고 가던 포구인 듯하다. 이곳은 비가 많이 오거나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 밑으로 잠기기 때문에 때로는 길을 우회하여 걸어야 한다.


망장포에서 바라본 바다
망장포를 지나는 오솔길에 올레 리본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제 길은 종점을 향하예촌망(망오름)에 들어선다. 예촌망은 작은 오름처럼 넓고 평평한 구릉지대이며 동서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원추형의 돔 화산체로 조선 시대에 봉수를 설치하여 해안방어에 이용했던 곳이다.


예촌망에 들어서자 멀리 한라산이 눈에 들어온다. 산길을 돌아 내려가는 돌담 옆에는 앙증맞은 꽃들이 언제 만날지 모를 스쳐가는 인연을 위해 자그마한 제 꽃잎을 뽐내며 활짝 피어 있다. 봄길을 걷는 그 누구를 맞이하기 위해 아침 이슬을 고 봄바람에 숨을 쉬며 생명을 피운 꽃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영원히 볼 수 없었던 생명들이 소중하기만 하다.



올레길은 오름 정상으로는 오르지 않고 주변 둘레길을 걷게 된다. 이제 길은 평평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이어진다. 이제 종착지인 쇠소깍이 얼마 남지 않았다.



쇠소깍 가는길


봄은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쇠소깍. 이곳에도 봄은 찾아와 벚꽃이 피고 있다. 관광객들은 테우를 타며 화창한 봄날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더욱 짙어진 초록의 민물은 길을 마치는 올레꾼을 맞아주고 있다.



길을 시작하며 설레었던 마음도 길 끝에 도착하니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길의 끝은 또다시 새로운 길의 시작이라 생각하며,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새롭게 시작되는 길을 걷기 위해 다시 저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위안을 삼아 본다.


아침부터 따라온 햇살에 봄 바다는 여전히 반짝거리고, 멀리 선 봄을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따스함을 내 온몸에 실어다 주고 있다. 이제 올레꾼의 걸음도 이곳에서 멈춘다.



반짝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맞는 늦은 오후의 봄볕이 좋다. 따스한 바람에 실려오는 봄 냄새에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가 힘들다. 아름다운 산책로와 붉은 동백이 있고, 첫사랑의 기억과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 있는 제주올레 5코스.


누군가 훗날에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지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스함이 가득한 어느 봄날의 오후.

그렇게 난 한참 동안이나 행복에 묻혀, 사방에 흩날리는 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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