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0년 전 요가 수행자라면
안녕하세요 마디님!
광복절에도 요가레터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8월 15일 요가레터에서 발행되었습니다.
인스타그램과 스레드에서도 만나요 @theyogacurator
특별한 날인만큼 오늘은 좀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를 가져와 봤어요.
평소 역사나 국제정치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오늘 레터 특히 더 흥미로우실 거예요
구독자님, 상상해보세요.
평화롭게 요가하며 살던 우리가 갑자기 10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됐다고요.
일제 치하 식민지 시대, 내 이름은 일본어로 바뀌고, 가족은 징병과 징용으로 잡혀갔어요. 학교와 회사는 문을 닫았고 거리는 혼란스러운 지금, 나는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해야 좋을까요?
A. 비폭력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요한 곳으로 들어가 평화를 위해 기도, 명상에 매진한다.
B.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인을 내쫓기 위해 무기를 만들거나 구매해 게릴라전을 벌인다.
C. 아무리 적이라도 살인은 좀 그러니 어떻게든 교육, 홍보, 외교 등에 힘쓰며 저항한다.
결정을 하셨다면, 마음 속으로 그 선택을 한 이유를 생각하면서 오늘 레터를 읽어보세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요가적 답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요.
요가적 가치 사이에는 우선순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다녀온 티벳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전 2주간 티벳에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어요. 만년설 덮인 히말라야 산맥, 그 아래 나부끼던 오색의 기도 깃발, 야크 버터 향이 진하게 풍기던 사원, 그 속에서 평화를 기도하는 사람들까지. 가기 쉽지 않았던 만큼 이국적이고 인상 깊은 여행지였습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더군요.
티벳은 1950년 중국에 합병되었습니다. 중국 내 티벳자치구 수도는 라싸인데요. 세상에서 제일 높은 땅, 깨끗한 물이 흐르고 야생동물이 뛰어놀던 작은 도시였던 이곳. 최근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고층의 아파트와 붉은 중국어 간판을 단 상가가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했거든요. 10년 전엔 차가 보이지 않던 길엔 이제 교통체증이 일상이 되었고요.
고유색을 잃고 여느 중국 신도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라싸의 모습을 보며 저는 티벳인들이 굳게 믿는 요가적 가치의 현실 세계에서의 효용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는데, 도덕적으로 고고한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를요.
저는 국제개발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 졸업 후에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했고요.
그래서 더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은데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몇 가지 기본개념을 요가적 맥락에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바로 '현실주의' & '이상주의'입니다.
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현실적이예요. 국가의 목표는 국민들의 안전 보장입니다. 국제정치라는 판은 권력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니 군사력 증강만이 살길이죠.
반대로 이상주의는 평화가 여러 나라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냐 선하냐라는 논쟁처럼, 답은 없습니다만 이상주의는 어쨌든 국제연합이라는, 인류사상 전후무후한 국제 공조체제를 만들어내며 사상을 실체화하는데 성공했지요.
'서로를 해치지 않고, 환경을 보호하고, 다른 나라를 착취/지배하지 않고, 협력을 통한 평화가 지속되는..' 이 이상주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념 아힘사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모든 생명을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해치지 말라는 이 덕목은,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서 가장 먼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가치인데요. <티벳에서의 7년> 영화를 보면 이 티벳인들의 아힘사 정신이 잘 드러나는, 재밌는 장면이 있어요.
극 중 어린 달라이 라마가 브래드 피트에게 영화관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하는데요, 공사는 착수부터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렁이 때문에요! 티벳 일꾼들이 삽으로 땅을 파다 지렁이를 죽이는 것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결국 한 쪽에서는 일꾼들이 땅을 파고, 한 쪽에서는 승려들이 지렁이를 구하며 희생 당한 일부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해프닝이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로 아힘사를 지키기란 쉽지 않지요.
국제기구에 근무하면서 제가 느낀 점은, 아무리 이상적이고 멋진 말을 외치는 사람들과 나라도 결국은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모든 외교적 행동에 계산기를 다 두드려보고 행동하거든요. 인도적 지원, 무상원조 다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빚을 졌기 때문에 지금 뭔가를 갚는다던지,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취할 이득이 있을 것 같아서 움직인다던지, 모든 것을 따져보고 그 규모와 방식을 책정해요. 현실적인 거죠.
일례로 티벳이 합병된 1950년으로 돌아가 볼까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같은 연도죠.
이상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티벳 사람들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국제적 지원이 있어야 했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우리나라와 달리 지정학적 가치가 별로 없던 티벳은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고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70년 전 똑같이 가난했고 힘없던 티벳과 한국. 2024년 지금 한 곳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한 곳은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부강한 나라가 되었죠.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요가 선생님께 질문했어요.
"선생님, 이번 여행에서 전 회의감이 들었어요. 나라도 없는데 무슨 아힘사예요? 그거 지키다 더 큰 고통이 생기잖아요. 나라 지키는 게 먼저 아니예요?"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응. 네 말이 맞아, 나라 지키는 게 먼저야. 사실, 요가 철학은 꽤 현실적이거든. 다르마라고 들어봤니?"
"다르마요?"
다르마는 개인이 자신의 본성과 위치에 따라 수행해야 할 고유한 의무와 역할을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소명> 과 가까운 개념인데요. 다르마는 단순히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을 넘어, 때로는 외부의 평화를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을 포함해요.
적이 쳐들어와 우리나라를 파괴한다면 나의 능력을 활용해 맞서 싸우는 것이 '다르마'가 됩니다. 요가는 나의 능력을 통해 내가 속한 공동체에 봉사하는 다르마가 항상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본대요!
그래서, 레터 맨 처음에 던진 질문의 답은 B와 C예요.
몰입을 위해 제가 일제 치하로 배경을 바꿔봤는데요. 사실 영국의 오랜 지배를 받은 인도의 요기들이 실제로 맞닥뜨린 딜레마입니다.
종교인들조차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국치의 상황에서, B와 C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하고 A를 하는 것이 옳은 다르마의 실천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고전 <바가바드 기타> 는 이 다르마를 주제로 합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고대 인도의 한 왕국, 여러 왕족과 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다루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바로 권력. '다음 왕위가 누구에게 갈까?' 왕위 앞에서는 형제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왕궁에서 함께 지내던 가문들 사이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죠.
이 책의 주인공, 아르주나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르주나는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머리에 활을 겨눠야하는 상황에 좌절합니다. 어제까지 살갑게 지내던 내 친척, 스승, 친구들의 얼굴들이 보였죠. '적국의 병사라면 몰라도, 아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쏘아 죽여야하다니! 차라리 싸움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슬퍼하지요.
그 때 절친한 친구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말합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은 자는 또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있으니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의무에 대해 한탄하지 말지어다. 그대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결과는 너의 영역이 아니다. 그대가 결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되 해야 할 일을 피해서도 안 된다. (...)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말고 이들이 같은 것이라 여기며 의무를 행하거라. 이 평정심을 요가라 하느니라.
『쉽게 읽는 바가바드 기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싸운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폭력이 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법과 판결에서 "의도"가 중요하듯, 요가에서도 "의도"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개인적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지혜/사랑/정의를 위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 행동은 요가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거죠. 오히려 그것은 좋은 카르마를 쌓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르마의 실패 가능성, 그리고 상대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문화마다, 공동체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마저도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니까요.
마하트마 간디에게는 '비폭력을 통한 저항'이 그의 다르마였는데요. 결국 그의 뜻대로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고, 영국에 대한 도덕적 우위도 챙겼습니다. 한편,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벳인의 다르마는 간디와 비슷하게 평화와 자비, 높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게 현실 세계에서 효과적이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티벳인의 오랜 믿음과 윤리관에서는 지금 고통받더라도 내적인 일관성을 갖는 것, 그리고 내세까지 도덕적 무결한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일 수 있어요.
미국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보셨나요?
다르마를 이해하고 나니 저는 비로소 오펜하이머가 왜 인터뷰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본인이 아주 끔찍한 사람이라서 "많은 사람을 몰살시키기 위한" 의도로 원자폭탄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고 고전을 통해 해명한 것 같았어요.
오펜하이머의 의도는 "압도적인 무력 차를 통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는 적국보다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일을 하는 건 본인의 의무였다고 대중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만든 원자폭탄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즉각적인 항복을 이끌어내, 일본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해방이라는 빛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지 말고 이들이 같은 것이라 여기며 의무를 행하거라. 이 평정심을 요가라 하느니라"라는 구절,
다르마를 알고 나니 이제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죠?
1. 요가에는 우선되는 가치가 있어요.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해야할 의무, 즉 '다르마'가 아힘사보다 항상 우선해요.
2. 다르마는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때로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다르마가 될 수 있죠.
3.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와 내 공동체를 위해 옳은 일을 하려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우리는 원하지 않는 누군가의 아래 놓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나라'가 없으면 나와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과 재산과 정체성까지 흔들리게 되고, 많은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미래는 상상하기 어렵고요.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가진 것을 총동원해 일제의 압제에 맞서 싸웠고, 수많은 군인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한국전쟁에서 싸웠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나'만을 위한 개인적인 동기가 아닌 나보다 더 큰 목적이 있었지요.
요가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 모두는 자신의 다르마를 다한 것입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그들 덕분임을,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란 걸 되새겨봅니다. 오늘 글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디 님의 다르마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글은 8월 15일 요가레터에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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