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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이응이응 Jun 17. 2024

쿠팡 알바 100일 적응기 -  5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누구에게나 루틴이 있다.


스스로 늘 내키는 대로 살기 때문에 뻔하지 않은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루틴이라는 건 별게 아니다.


나는 ‘보통’ 아침은 먹지 않는 편이라거나

점심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대개’의 하루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마무리한다고 하는 그런 일들이 바로 루틴이다.


흥미로운 건 루틴을 바꾸고자 하는 건 무너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을 먹지 않았던 루틴과 아침을 먹는 습관은 공존할 수 없다.

기존의 루틴이 무너져야만 새로운 루틴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새벽 6시 무렵에 집을 나서는 것으로 내 루틴은 무너졌다.


루틴이 무너지고 새로운 루틴이 자리를 대신하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쿠팡으로 가는 길은 멀었으며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일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뻘쭘하기만 했으니까.


의자와 책상이 붙어있는 일체형 의자가 다소 어지럽게 채워진 교육실에는

나와 같이 교육을 받을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 되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많게만 느껴지던 내 나이가

별로 티 나지 않는 느낌이어서 좋았다면, 무의미한 자기 위안이었을까.


인원수에 맞춰 놓은 것인지 ‘건강상태 확인서’가 놓인 책상과 그렇지 않은 게 보여서,

건강상태 확인서가 놓이고 되도록이면 나가는 문에 가까운 자리를 선택해 앉았다.


건강상태 확인서는 말 그대로 쿠팡에 지병이나 현재의 건강상태를 알려줘야 하는 문서였다.


진단받았거나 치료 중인 질병, 만성질환이나 뇌질환 혹은 정신질환이나 호흡기계 질환 등을

 앓고 있다면 적어 넣어야 했고 최근 5년 이내 수술이나

시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도 고지사항이었다.


아직은 운이 좋아서 내가 가진 만성질환이라고 해봐야 꽃가루철이 되면

찾아오는 비염과 알레르기성 결막염뿐이었으니,

내가 표시할 부분은 해당 없음 밖에 없었다.


나이대가 다양한 사람들이 교육실을 채우고 있었으니 다른 이들은

어떨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내 앞에 두 자리 건너쯤에 앉은

50대 ‘동기’ 여성이 채운 서너 줄이 어렴풋이 보이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뜨끔 했다.  

 

쿠팡의 신규 교육에 교육 강사가 따로 동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HR이라고 하는 인사팀 혹은 채용팀이라고 할 수 있는 부서에서

신규 교육과 채용을 맡는 걸로 보였는데,

교육은 직장 내 성희롱 및 성차별 교육 관련 영상이 재생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현재를 현재의 상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라면 전혀 새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내용의 영상이었고, 이어진 영상은 안전교육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봐야 할 영상의 마무리 끝에는 보는 이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영어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How did I ever live without Coupang’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정도로 해석이 되는 이 문장은 쿠팡의 비전이다.

어떤 기업이든 쿠팡이 가진 것 같은 비전이 없는 곳이 있을까 싶지만

쿠팡의 비전은 특히 의미심장했다.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쿠팡 없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쿠팡에 적응했듯 쿠팡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사람들은 쿠팡의 부재에 적응하며 잘 살 것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성장해서 사람들의 일상에 큰 흔적을 남긴 쿠팡이

이미 역사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쿠팡은 내 인생에서 어떤 흔적이 될까?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있어 아예 없었으면 더 좋았을 한때가 될까,

아니면 최소한 남은 삶에 뭔가 보탬이 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까?


무엇보다 분명한 건 나는 쿠팡에서 보내게 된 이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는,

단 하나의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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