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은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타인이었다.
가능한 한 떨어져 앉은 우리들은 인연이라기보다는 우연으로 엮였고,
쿠팡이 아니었다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모여 앉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시간 정도 이어진 교육 영상 시청 후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남겨야 했는데,
이름과 원바코드(전화번호)에 생년월일에 사인을 해야 하는 문서가 시험지처럼 교육생들 사이를 돌았다.
사인을 하면서 확인한 교육생들의 나이는 20대에서 50대로 다양했는데
왜 그때 60이 가까운 나이에 쿠팡에 오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마지못해 쿠팡에 와서 일하려고 한 것이 아닌,
단지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아직도 새로운 경험에 목이 마른 부류의 사람들일 수도 있었는데.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불편해했지만
그 불편함을 자신의 불안 때문에 무시해 버리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조잡한 인연의 끈으로 묶어 의지되는 친구처럼
하루를 같이 보낼 존재를 찾는 사람들.
50이 넘어 보이던 남자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청년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청년의 마지못한 단답이 뭉개진 발음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는
분명 탐탁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일방적인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그 남자는 두려웠던 것일 테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짧아진 시점에 섰어도,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의 공간에서 일어나고 겪어내야 할 일들이 주는
두려움은 더 줄어들지 않았다.
영상 교육이 끝나자 보안팀 담당자가 쿠팡의 보안과 검색대안으로
갖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것을 안내해 줬다.
휴대폰이나 전자기기는 잘 알려져 있듯 반입할 수 없었고,
뭘 갖고 들어갈 수 없느냐가 아닌 소지 가능한 게 있느냐를 꼽는 게 훨씬 쉬웠다.
립밤이나 핸드크림조차 소지가 불가능하고 작은 간식거리라고 해도
혹시 도난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반입할 수 없다고 보면 됐다.
실질적이고 알찬 교육이라기보다는 교육을 했다와 받았다. 를
증명하기 위한 게 더 커 보이는 약 2시간이 안 되는 교육이 끝나자
이제 나와 동기들은 현장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는 물건들을 사물함에 넣고
화장실이 없는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들를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입고와 출고, 허브 등의 공정에 맞춰서 담당자들이 사람들을 인솔하기 위해
교육실을 찾았고 나는 약 10명 남짓되는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서서
사원증을 태그하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쿠팡 물류센터 작업장이 창고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크고 더 특이한 구조에는 현실감을 잃는 기분이었다.
물류센터는 거대하고 높은 공간을 계단으로 나눈 모양이었다.
그래서 2층이나 3층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2.1층이나 2.2층으로 부르는데,
이는 엘리베이터로 다른 층에 가려고 한다면 일반 건물의 1층이 아닌
2-3층 정도를 가는 시간을 보내야만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엘리베이터 옆에 비상계단은 엘리베이터와 함께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실제로 사물함이 있는
2층에서 식당이 있는 4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2층이 아닌
4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현실감은 없었지만 공간이 주는 쿠팡의 의도는 너무나 확실했다.
작업장은 오롯이 작업을 위한 공간이며 그 안에 작업을 하는 사람을 위한
고려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인솔자를 따라 계단 사이로 아래 작업장이 보이는 철 계단을
탕탕탕 소리를 내며 올라갔고, 도서관처럼 수많은 선반이 늘어선 공간 사이로 들어섰다.
도서관보다 훨씬 밝지만 아늑함이나 고요함은 없고 세상의 모든 물건들이
진열된 것 같아서 너무나 세속적으로 느껴졌던 공간.
우리는 이제부터 쿠팡이 내일 입금해 줄 일당만을 목적으로
이 드넓은 공간을 누비게 될 거였다.
우리의 불안감은 아랑곳 없이 작업장 안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인기의
드라마 ost가 리듬감 있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