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과 지구별 여행 중
20대 초반 친구와 하동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마을 골목에 달팽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천천히 여행하라고 안내해 주는 귀여운 캐릭터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동은 슬로시티 중 한 곳이었다. 하동 여행의 좋은 추억 때문일까, 슬로시티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2025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15개의 슬로시티가 있다. 태국에는 치앙마이, 빠이가 대표적인 슬로시티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인증받은 슬로시티는 아니지만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슬로시티의 철학과 닮아 있다) 이 두 도시는 볼거리가 많거나 화려한 곳은 아니지만, 느린 여행을 즐기거나 지친 사람들이 재충전하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다.
가훈이나 교훈을 보자. (요즘에도 가훈이 있는 집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가훈이 '가화만사성'이라면 그 집은 어쩌면 화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오히려 가정의 화목이 부족해서 바깥일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화목해지자라는 다짐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훈이 '배려와 존중'이라면 그 교실은 배려와 존중이 부족한 상태일 확률이 높다. 제발 서로 배려 좀 하고 존중 좀 해서 교실 좀 평화롭게 만들어보자는 선생님의 염원이 담긴 말일 테다.
그렇다면 여행의 컨셉이 '사바이 사바이'라면? 현실의 삶은 편안하지 않고, 느긋하게 보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슬로시티를 찾아가는 이유는, 일상에서는 그 느림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 전에 읽은 치앙마이 여행책에서 '사바이 사바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이번 여행의 주요 키워드가 이거다! 싶었다. 이 말은 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라는 뜻으로 그들의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느리게, 천천히, 편안하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계획과 현실의 간극이 커지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유명한 사원이었지만, 현실은 현지 놀이터에 몇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일정이 늦어지면서 기대했던 맛집은 문을 닫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 찰나, 피곤해진 아이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숙소로 돌아가서 쉬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집착을 내려놓기로 했다. 계획에 연연하지 않으며 천천히, 편안하게 여행하리라.
20대 때는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21살에 떠난 유럽 여행은 30일 동안 10개 나라를 돌아보는 빡센 일정이었다. 한 도시에 2~3일 머물며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찍고' 오는 것이 여행의 본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곳에 최대한 오래 머물면서 천천히, 사바이 사바이 걷고 싶다. 낯선 길에서 지도 앱이 알려주는 길이 아닌, 내 발이 닿는 곳으로 걸어보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면서 그렇게 천천히 다니고 싶다. (그러고 싶다는 것이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함께라면..?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 이 또한 나의 욕심이고 집착이기도 하다.)
택시가 잡히지 않을 때,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 않을 때, 계산대 앞에 선 줄이 줄어들지 않을 때 내가 슬슬 짜증 내기 시작하면, 남편이 옆에서 조용히 말해줬다.
“사바이 사바이”
그러면 신기하게 날뛰던 뇌세포들이 잠잠해지는 느낌이었다. "워워... 진정해."라고 말해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나는 치앙마이에서뿐만 아니라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허둥대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사바이 사바이'라고 주문을 건다. 사실... 남편이 내게 말해줄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나는 '사바이 사바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도 '사바이 사바이'를 떠올리려 한다. 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때로는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편히 가지려 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완벽한 준비나 빈틈없는 일정이 아니라, 그 순간에 머물 줄 아는 여유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
언제나 나를 재촉하던 마음에 이제는 조용히 말해준다.
'사바이 사바이. 지금 이대로도 좋아.'
그리고 그 말 한마디로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해주고, 현실을 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