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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여행을 다녀오렴.

아이 셋과 지구별 여행중

by 오로시

엄마는 올해로 결혼 10주년이 되었단다. 20,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오신 분들 앞에서는 아직 한참 모자란 풋내기로 보이겠지만, 누군가와 원만하게 10년 동안 함께 살아왔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야. 처음엔 서로의 다름에서 오는 갈등을 풀어가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선 것 같아. 종종 친한 친구나 동생들이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좋을지 물어보곤 해. 그래서 엄마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

언젠가 너희도 사랑에 빠지고, 함께 살아갈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 엄마의 생각을 이야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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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단다. 같은 행동도 누군가에게는 집착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처럼 느껴질 수 있어. 연애는 그런 차이를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연락 문제. 나는 퇴근한 후에 편하게 연락하고 싶은데, 상대방은 하루 종일 생각날 때마다 연락하기를 바란다면 갈등이 될 수 있지. 그럴 땐 대화를 통해 조율해야 해. 아침에 한 번, 점심 무렵에 한 번, 저녁엔 좀 길게 연락하는 식으로. 중요한 건 서로가 노력하려는 모습을 보이는지야. 하루 종일 연락하고 싶더라도, 상대방이 이전보다 더 많이 연락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면 나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어야 해.


'이게 사랑인가?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건가? 나만 참고 맞추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 그리고 상대방의 노력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긴가민가한 관계는 오래가지 않아.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기 마련이니까.


둘째,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인지 보기

연애는 '좋아하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오래 간단다. 연애 초반, 누구나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상대방이 좋아할 행동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한 건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알고,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엄마는 한때 싫어하는 감탄사가 있었는데 당시 남자 친구였던 아빠가 그 말을 자주 쓰곤 했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더니, "정말? 몰랐어. 미안해. 고쳐볼게."하고 말하더니 이후로 그 말을 더는 하지 않았어. 그때 '아. 이 사람은 나를 존중하는구나'하고 느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이어졌어.


반대로, 네가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 너만의 취미를 즐기는 것처럼 너답게 살아가는 방식을 싫어한다면서 통제하려 든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물로 보는 거야. 진정한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거니까. 너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인지 꼭 살펴보렴.


둘째, 함께 힘든 여행을 다녀올 것

엄마가 말하는 여행은 멋진 호텔에서 쉬는 럭셔리 여행이 아니야. 배낭 하나 메고 발로 걷는, 때론 피곤하고 힘든 여행. 일부러 상대방을 시험하려고 여행을 가라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힘든 여행을 함께 다녀와 보면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그리고 그런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 좋은 추억도 많이 생긴단다.


엄마와 아빠도 연애하던 시절 뚜벅이로 경남 지역을 여행했단다. 창녕 우포늪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우포늪 입구까지의 꽤 먼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어. 한겨울 비수기라 그 길을 따라가는 차들도 거의 없었는데, 한 대의 차가 멈췄지. 중년 부부가 본인들도 우포늪 가는 길이라며 우리를 태워주셨단다. 그 부부는 우리를 보며 "예쁘고 좋을 때"라고 말하며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하시며 웃으셨어. 그날 이후,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자고 다짐했지.


황량한 겨울의 우포늪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합천 해인사를 고즈넉하게 거닐고, 장어 먹겠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부산 깡통시장 안에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으면서 야식을 먹었던 그 여행은 엄마,아빠가 함께하는 모험이자 첫 번째 여행이었어.


하지만 진짜 여행은 변수와 어려움이 생길 때 완성된단다. 하루 두 번 뿐인 버스를 놓쳤을 때, 깜깜한 밤에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비수기라 숙소들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 어렵게 숙소를 구했을 때, 오랫동안 손님을 받지 않아 방바닥에 먼지가 쌓여 걸레로 직접 방바닥을 닦고 자야 했던 일, 오랫동안 보일러가 꺼져있어서 냉골 같은 방에서 오들오들 떨었던 일. 그 순간에 진짜 모습이 나타나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엄마는 힘든 상황이 오면 상대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었단다. 그리고 갈등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컸지.


'버스 시간을 제대로 확인했었어야지.'

'왜 숙소도 없는 곳으로 온 거야.'


속으로 불만이 쌓여갔어.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면 이별 여행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속으로 상대방을 탓하고 있었을 때 아빠는


"미안해. 내가 버스 시간을 잘못 알았어."

" 방이 많이 춥네. 내가 방 닦고 있을게. 이불 덮고 있어." 라고 말해 속으로 아빠를 탓하던 엄마를 부끄럽게 만들었어. 상황을 탓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에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반대로 엄마는 상대가 앞에 있는데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예의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빠가 버스정류장에서 핸드폰으로 본인의 염색약을 주문하더라.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정성 들여서 말이야! 지금은 염색도 안 하는데 말이지. 엄마는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났어. '내가 염색약보다 못한 존재인가?'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 데이트 중이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갔을 텐데, 버스는 30분 후에 도착하고, 주변은 허허벌판. 갈등을 정면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회피형이었던 엄마조차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마주해야 했어. 그렇게 싸우고 울고, 화해하고 나서 먹었던 포항의 해맞이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


그래서 커플들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거나, 여행지에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부럽고 옛날 생각이 나. 엄마는 우포늪에서 엄마, 아빠를 태워주셨던 분들처럼 이제 '예쁘고 젊을 때'가 무엇인지 알게 됐거든. 너는 아직 모르겠지?


상대방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 여행을 가란 말은 아니야. 반대로 상대방이 널 테스트하기 위해서 여행지에 데려간다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하지만 인생은 여행과 닮아 있어서 원하지 않아도 시험에 들게 되는 순간이 생기곤 해. 체력이 좋고 기분이 좋을 때면 그게 무슨 대수겠어. 사람의 밑바닥은 힘들고 피곤하고 예민한 순간에 보이는 거거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대화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인생의 문제도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일 거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참고, 희생하는 관계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함께 할 수 없을 거야.

여행하다 보면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니,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그래서 결혼은 여행과 닮았어. 누군가와 오랫동안 같은 길을 함께 걷을 수 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야.

함께 여행할 때 가장 좋은 순간은, 내가 기억하지 못한 부분을 상대방이 기억해 줘서 여행처럼 퍼즐 조각이 맞춰질 때인 것 같아. 엄마가 혼자 여행을 다녔을 때와는 다른 기쁨을 느끼게 됐어.


엄마는 너희와 함께 여행하는 중이니 우리의 여행은 너희의 기억까지 더해져 더 촘촘하게 채워지고 있는 거겠지. 우리 오래오래 함께 걷자. 그리고 너희도, 언젠가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길, 진심으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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