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

by 일경

남자는 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이 선포한 ‘악플러와의 전쟁’ 관련 기사를 보고 있는 남자.

별생각 없이 기사를 클릭하곤 헤드라인의 큼지막한 글씨를 보았다가 고소장을 들고 있는 연예인의 사진을 본다. 사진 속 연예인은 그동안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낯선 얼굴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남자.


남자는 유리벽 앞에 서 있다.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벽. 벽은 너무나도 투명했기에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유리벽이 가진 특별한 힘. 그 힘은 지옥도에 가까운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더라도 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다.


남자는 생각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건이기에 이 사람이 총대를 메는 거지? 뭐가 이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남자는 유리 벽 너머 일어나는 일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까이, 유리벽에 가까이. 그리곤 흐리멍덩한 눈알을 벽 틈새에 비집고 넣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알게 되는 남자. 총대를 메는 게 아니라 칼을 뽑았던 거구나. 그래서 사진 속의 두 눈이 분노에 가득 찬 것이구나. 사실 아주 조금이라도 제대로 그 기사를 보았더라면 총대를 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벽은 투명함과 동시에 너무나 두꺼운 모습.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두껍고, 그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의 두께를 가진 유리벽.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 모습이 심해를 연상하게 될 정도의 깜깜한 모습을 띄고 있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무던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면 그 벽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유심히, 아주 유심히.


남자는 보고 있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N사의 웹툰을 보고 있는 남자. 작가의 기막힌 연출 덕에 피해자인 주인공의 심리가 유리벽 너머 남자에게 고스란히 심어진다. 가슴이 아려오는 남자. 웹툰 아래에 달린 ‘학교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이런 잔혹한 짓을 하고 웃을 수가 있는 것인가.’ ‘방관하는 주위 사람들도 똑같은 가해자일 뿐이야.’라는 댓글들을 보는 남자. ‘best’라고 적힌 번지르르한 마크가 박혀있는 댓글들은 모두 폭력에 분노하고, 피해자에게 연민을 표했다. 공감의 엄지 버튼을 누르는 남자. 한술 더 떠 베스트 댓글과 같은 분노와 연민의 댓글을 남긴다. 댓글을 적어놓고 나니 어딘가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남자. 유리벽에 비친 남자의 눈빛에도 나름 분노가 서려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알에 지펴있는 분노란.


그것 또한 유리벽의 힘. 남자는 애써 무시한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날, 남자는 같은 반인 여자아이의 외모를 비하하고 조롱을 한 사실이 있다. 제발 그만 괴롭혀달라고 소리치며 오열하는 그 아이에게 콧방귀를 뀌며 더욱 세게 가해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난날, 남자는 학급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던 동급생을 ‘단순 장난이잖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무리와 구타를 한 사실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고, 구타를 한 사람들과는 기괴한 유대를 가지게 되었단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유리벽 너머 일어나는 학교폭력에 분노했다. 피해자에게 연대하고 그 설움에 공감했다. 어렸을 때 이야기니까, 지금은 생각이 깊어졌으니 그러지 않는다는 합리화가 본인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는 계속해서 남자를 간질이고 있었다. 어쩌면 알레르기의 일종일지도? 증상은 가려움과 숨 막힘. 남자는 간지럼을 느끼다가 점점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리벽은 또 다른 지옥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것을 보았다. (무언가는 어디에선가 남자를 긁고 있지만) 그리고 또다시 유리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지옥에 분노하는 남자. 또는 눈물을 머금기도 하는 남자. 혹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띄고 있는 남자. 벽은 너무나도 투명하면서 두꺼우므로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 모습이 심해를 연상시킨다. 끝이 어딘지 모를 검정 화면 앞에 앉아있는 남자. 남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것의 이름은 유리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