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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경 Mar 11. 2022

비상 깜빡이 켜는 마음 정도는

자동차에 달린 이 녀석은 주로 비상등, 혹은 비상 깜빡이라고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비상 경고등’이라고 한다. 주로 운전 중 자동차의 고장이 나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점등해 주변에 알림으로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물론 운전하다 보면 위와 같은 용도로 쓰일 때도 있지만(그것이 옳게 쓰는 것이지만), 나는 주로 이 비상 깜빡이를 내가 한 행동에 사과할 때나 감사를 표할 때 켜곤 한다.


외국에도 이와 같은 문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운전 문화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이 깜빡이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건 좀 위험했는데, 싶을 정도의 운전을 하는 앞차가 나에게 비상 깜빡이를 켠다면 빠르게 치솟은 분노지수가 곱절로 빠르게 식는다. 그래,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엄청 급한 일이 있었을 거야. 하며 빠르게 평정심을 찾게 된다. 반대로 같은 상황에 깜빡이를 켜지 않는 운전자를 만난다면, 분노는 더욱 깊고 넓어져 얼굴도 모르는 앞차 운전자의 인생을 저울에 올려 스스럼없이 평가하게 된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운전자가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비상 깜빡이, 이 녀석이 뭐길래 우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일까?


사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비상 깜빡이 자체에 어떤 마법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굳이 비상 깜빡이 버튼을 누르는 운전자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헤아리는 것이고, 동시에 비상 깜빡이 버튼을 굳이 누르지 않는 운전자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이다. 나는 이 ‘굳이’의 마음이 우리에게 작지만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상 깜빡이를 굳이 켜는 데에는 ‘나에게는 엄격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하게’라는 마음이 곁들어 있다. ‘굳이’의 사전적 정의에는 ‘단단한 마음으로 굳게’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굳이 깜빡이를 켜는 이유에는 나보다 타인을 위한다는 어떤 신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상대를 위하는 이타적인 신념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 이타적인 신념은 이를 받은 자는 물론, 이를 행한 자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 이타적인 신념의 종착지엔 평화가 있다.


평화. 2022년의 세상은 평화가 간절하게 필요하다. 모든 걸 다 가진 세상인 것 같지만, 아직도 가지지 못한 것이 많아서 타인을 물어뜯고, 내 살길만을 고민한다. 운전대를 잡은 그 상황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에 크게 분노하듯 오늘날 우리는 ‘굳이’ 깜빡이를 켜지 않은 모든 것에게 분노한다. 그 분노가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분노한다. 분노하고, 또 분노한다. 내가 옳고, 당신은 옳지 않다는 마음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욕망이지만, 우리는 이를 거스르고 나보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이 가진 몇몇 원초적 욕망은 거슬렀을 때 빛이 난다. 욕망을 거스르고 이를 실현 했을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차체 속, 시속 100km가 넘는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움켜쥐고 있는 당신. 마음에 여유 하나 없고, 엔진 소리는커녕 귓가에는 심장 뛰는 소리만 들리는 당신은 본인도 모르게 옆 차선에서 달리고 있는 차를 향한 칼치기를 하고 말았다. 칼치기를 당한 차는 급격히 속도를 줄이고, 상향등을 켰다가 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비상 깜빡이 버튼. 당신의 두 손바닥엔 땀이 흥건하지만, 굳이, 굳이 이를 누를 것인가? 당장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존의 욕구를 누르고 당신은 굳이 이를 누를 것인가?


비상 깜빡이 켜는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작고 하찮은 행동일지라도, 우리는 비상 깜빡이 켜는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토록 위험한 세상에서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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