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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경 Mar 18. 2022

허송세월은 무엇인가

얼마 전, 친한 친구 D와 대화를 나누다 이름 사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D는 사주를 봐준다는 이유로 생년월일 그리고 시를 물었고 나는 답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가끔 이런 사주와 관련되어 태어난 시간에 관한 정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것을 말함에 막힘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내 생일이 5월 2일임과 동시에 오전 5시 2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상당히 기묘하다고 생각했고, 그 기묘함의 농도만큼 내 머릿속에 5월 2일과 5시 2분의 숫자는 선명하게 각인 되었다.

 

야, 결과가 완전 딱 넌데? 근데 이를 어쩌나...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이름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줄줄이 쓰여있었다. 음과 양의 조화가... 발음의 오행이... 그냥 넘어갈 법 싶었지만, 20대까지의 사주를 보니 현 상황까지의 삶과 유사한 점이 참으로 많았다. 그래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은 “심신이 미약한 이유로 실패를 계속하면서 좌절하고, 재기하지 못해 허송세월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정말, 그런가! 하며 이름을 바꿔야 하나, 좋은 이름으로 바꾸면 마법처럼 삶이 바뀌는 건가, 애초에 이름 사주라는 게 웃기지 않은가, 그럼 외국인은 이름 사주를 어떻게 보는 거지, 싶으면서 만약 나의 운명이란 게 실재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사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종교, 제의등 커다란 개념부터 별자리 점, 커피 점, 타로 등의 개념들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론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거대한 나의 운명이 변하진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슬픈 합리화였다.     


한바탕 이름 사주 돌풍이 지나가고, 나에게 남은 것은 사주 풀이의 문장 하나였다. 허송세월하게 될 것이다. 허송세월은 무엇인가? 빌 허에 보낼 송, 하는 일 없이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 허송세월의 뜻을 보며, 나는 어떤 세월을 헛되이 보냈는가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종목만 달랐을 뿐 늘 공부보단 놀이가 먼저였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던 해까지 진로는 계속해서 바뀌다가 늘 답이 없는 상태로 회귀하곤 했다. 운이 좋아서, 정말 좋아서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괴기한 심정인지 당신은 아는가) 가고 싶던 대학은 갔지만 말이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어떤 대의를 품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삶이 허송세월이라면 이를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대학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삶도 그러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나를 더욱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마냥 인정해야 할 노릇은 아니었지만, 그리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4년, 군대 2년, 그리고 지금 오늘날까지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했지만 정작 내 손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두가 있다는 스팩 아닌 스팩도 나에겐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사치 부리지 않고 땀 흘리며 살아온 것 같은데, 내 나름의 노력은 사주 상으론 허송세월로 치부되는 것일까. 속내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내가 피를 토하며 노력하는 사람처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가 아니면, 내 인생은 허송세월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내 인생은 잘 살아왔다고 합리화하여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로 인해 용기를 얻는다면 그럼 허송세월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     


나는 허송세월을 생각한다. 인생을 잘 살았다는 건 무얼까? 준비하는 삶이 잘 사는 것일까, 즐기는 삶이 잘 사는 것일까. 희로애락의 덧없음을 깨닫는 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희로애락이 덧없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웃으면 행복한 것일까? 울면 불행한 것일까? 그런 모순의 연결고리는 ‘점(사주)은 타인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하찮은 결론에 끊어지게 되었다. 나의 삶은 내가 결정한다는 유치한 결론과 함께. 참으로 유치하고, 진부했다. 어쩌면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허송세월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이 생각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다시 모순의 연결고리는 이어지고, 그렇게 또 고리는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름 사주 상 내 인생의 마지막은 ‘공혀격’, 실패와 좌절에 무너져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흉한 사주다. 그렇겠구나. 나도 언젠가 생을 마감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아니 많이 무섭다.  


나는 거대한 공포의 파도 아래 삶과 죽음의 희비는 너무나도 작은 찰나의 순간이겠다, 싶었고 그 찰나의 순간이 나에게 끼칠 영향을 상상하다가 -만약 저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거대한 공포의 파도도, 삶의 행복도, 죽음의 슬픔도 없는 공허로 회귀하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아무 의미 없고, 모든 의미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의미 없고, 모든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한 언젠가 공허가 되는 것을 어찌 흉한 사주라고 할 수 있을까.

슬픈 합리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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