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여유로 커피를 마시며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삶(여행)을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어떤 풍경으로 보이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구성된 글은 명장의 내공 덕에 재미있게 읽혔다. 책 내용 중에 대학교 강의를 할 때는 도통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문단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것은 내가 대학교 강의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름의 엄격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오는 것들에 대하여> 초고를 완성했을 때 인 2020년 12월, 나는 새로운 작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민하면 할수록 원하는 바로 되지 않는다는 걸 지난 경험들에서 익히 해왔기에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받은 듯 20년이 저물어가기 직전의 어느 날,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쓰레기 속에서 사는 인물들의 코미디를 써보자, 그 코미디는 분명 웃기면서도 슬플 거야. 용산에 위치한 효창공원을 산책하면서 문득 얻은(!) 생각이었다. 고작 3년 남짓 글을 써왔지만,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하사(?) 받을 때 누리는 행복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하면 너무 거만해 보일까.
그러나 4월이 다 된 시점인 지금, 그 작품은 한 글자도 써내지 못했다. 아이디어와 자료 수집만 열심히 했을 뿐, 문학으로썬 아직 수정(受精)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묘하게도 효창공원에서 만난 그 녀석은 현재까지 내 머릿속에서 은은하게 맴돌고 있다. 지금은 바쁘니까 좀 나중에, 나중에, 라는 생각은 녀석과 나의 관계를 행복인지도 불행 인지도 모를 족쇄로 연결했다. 이제는 정말 녀석을 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그냥 이런 관계로 평생 같이 지내야 할까 하는 고민이 확신으로 될 때쯤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나만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하는 게 아니구나 싶으면서 얼마쯤 책을 더 읽다가 꽃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앞당겨 벚꽃의 절정을 맞이할 것이라 하더니 정말 사방이 꽃밭이었다. 요 며칠 비가 온 탓일까 벌써 떨어진 벚꽃도 보였다. 나는 만개한 벚꽃 나무와 그늘진 곳에 심어진 이유로 아직 몽우리를 가진 벚꽃 나무, 그리고 일찍이 꽃을 피우고 비를 맞아 앙상한 모습을 한 벚꽃 나무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아직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은 떨어진 벚꽃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거친 아스팔트 위에 소복 눈같이 내려와 있던 녀석과 나와의 묘한 만남을 생각했다.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고 웃음 지을 때, 너를 바라보는 것은 누구일까. 아니면 바라봤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내 오만이 널 슬픈 모습으로 보이게 한 건 아닐까. 애초에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는 건 옳은 일인가에 대해. 녀석과 나의 관계 정립에서 오는 고통을 은은히 느끼다가, 나는 또 수정조차 하지 못한 그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냥 그런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앉아있는 지금은 녀석들과 비슷한 나의 모든 관계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 옳고 그름의 굴레에서 유일하게 옳다고 깨달았던 건, 내가 느낀 고통이었다.
대한민국의 일 년은 죽은 생명이 살아나, 만개하고, 시들어, 죽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봄이라는 같은 시간에 있어도 벚꽃의 삶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서 봄은 작은 일 년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떨어진 벚꽃의 존재 아이러니는 나의 기준에서 세워졌다는 걸 느꼈고, 거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관계와의 아이러니도, 세웠던 옳고 그름도 새롭게 점검하게 되었다. 모든 생명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던 봄 속에도 만개하고, 시들어, 죽는 모습이 있음을, 나는 모든 찰나의 순간에 작은 일 년을 보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