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메타버스의 정의를 살펴보자. 메타버스란, ‘가상’, ‘초월’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 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세계를 가리킨다. 메타버스는 가상현실(VR, 컴퓨터로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사람이 실제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최첨단 기술)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개념으로, 아바타를 활용해 단지 게임이나 가상현실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현실과 같은 사회·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코로나가 세계를 덮치면서, 인류는 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 덕분에 메타버스라는 획기적인 방안은 자연스레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메타버스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시장 덕분에 기술의 발전은 물론, 사용자도 많아져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가 우리의 세계를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회의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존의 세계가 더욱 우수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만이 아닌, 이미 메타버스가 지닌 본질은 우리의 삶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는 새로운 세계인가?
얼마 전, 꽃 구경을 다녀왔다. 창덕궁에 홍매화라는 붉은 벚꽃이 유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종로 3가 역에서 내려 창덕궁 앞 건널목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엄청난 인파가 창덕궁 앞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내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나는 엔데믹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체감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창덕궁으로 들어오자 많은 사람이 이곳저곳 피어있는 꽃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 역시 우아한 한옥과 어우러지는 꽃을 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그제야 이곳에 사람이 많은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창덕궁과 꽃을 구경하는데, 저 멀리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곳에 홍매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홍매화가 피어있는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심지어 홍매화와 한옥이 절묘하게 배치되어있는 이른바 ‘포토존’에는 입장줄을 방불케 하는 인파가 홍매화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영원히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그 줄을 바라보며, 저렇게까지 해서 ‘내’ 사진을 남기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 지에 관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답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인스타에 올려야 하니까!
나는 그 광경을 생각하며, 현시대의 SNS가 이미 메타버스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IT 기술을 활용하여, 삶을 데이터화 하고, 이를 공유하며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은 메타버스가 지닌 본질과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SNS라는 메타버스에 ‘나’라는 캐릭터를 존재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현실 세계에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SNS를 사용하는 사람의 세계가 이미 메타버스의 단면을 띠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각’에 목숨(?)을 걸 정도의 노력을 하는 양상을 ‘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대체 불가능 한 세상
겪어보지 못했던 판타지 세상과 내가 만든 귀엽고 멋진 캐릭터의 구현은 메타버스를 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어쩌면 고리타분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한 존재이고, 더럽고 못난 세상이라도 그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이 내게 주어진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부족한 환경과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 그것보다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는가? 우리의 삶은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 ‘깨달음’과 ‘신념’에서 원동력을 얻는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기술력이 극한으로 발전하여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식을 구현할 수 있고, 그를 통해 깨달음과 신념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를 메타버스로 대체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메타버스는 우리의 세계를 대체할 수 없다는 내 주장은 변하지 않는다. 메타버스라는 (현재로서) 완벽한 세계가 도래하고, 우리의 삶이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그 세계는 이미 우리가 희망했던 ‘메타버스’라고 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 내 본질적인 주장이다.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고 한들, 인간은 또 새로운 문제를 겪고,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타버스의 구현을 욕망했던 사람들은 메타버스의 구현을 통해 그 욕망을 해결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욕망을 해결하는 방법은 대체할 수 있는 세계라는 ‘수단’이 아닌, 우리 자신의 깨달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메타버스는 우리의 세계를 대체할 수 없다.
당신이 만약 SNS가 어떻게 메타버스랑 다름이 없냐는 생각을 가졌다면,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SNS에 우리의 어떤 모습을 공유하는지. SNS에 이 모습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는지. 왜 SNS에 그런 모습을 공유하는지. SNS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지. SNS가 내 삶의 본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 연관성이 내 삶의 참된 본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