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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경 Jan 15. 2022

낙엽

11월에 접어들면서 낙엽의 나풀거림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나풀거리는 모습엔 어떤 슬픔이 느껴진다. 그것은 5월, 벚꽃 잎의 흩날림과는 다른 것이다.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낙엽은 꽃잎보다 무거워서 그런 것일까? 산 정상에서 불법한 바람을 타면 꽃잎은 하늘 어딘가로 사라지지만, 낙엽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것이 내 무게고, 나는 여기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걸까.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라는 운명론적 사실이 나는 뭔가 슬프다. 아니면 꽃잎과는 다르게 바싹 메말라 있으므로 슬픈 건 아닐까? 자동차의 바퀴가, 사람과 짐승의 발자국이 녀석을 지르밟는다면 무슨 생김새였는지도 모르게 산산조각이 나서, 짓밟힘에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꽃잎과는 다르게 흘릴 눈물마저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낙엽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꽃의 본분을 마치게 하고 잎을 피우게 만드는 온풍과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듯 냉랭한 온도의 바람이 낙엽의 모습을 슬퍼 보이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는 바깥바람이 쐬고 싶은 이유로 아무 외투나 걸치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11월의 바람을 맞으니 낙엽의 존재 자체가 슬픔의 이유가 아니라는 논리에 설득이 되는 듯했다. 햇빛이 쨍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금세 움츠러들고 말았다. 입김이 녹진하게 나오는 한겨울보다 적응할 새도 없이 끝을 알리는 바람이 부는 가을이 더 추운 것 같다.      


결국, 낙엽의 나풀거림과 관련된 슬픔은 끝을 의미하는 자연현상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라며 나 자신을 이해시키고 말았다. 영 좋지 않았다. 그것은 애매한 답에서 오는 찝찝함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자연현상이라서,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현실이 아닌 내 마음뿐이라는 사실이 영 좋지 못한 이해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니까. 제힘으로 슬픔을 바꾸지 못한 나는 이해라는 이름의 합리화를 한 것에 대해 자위하고 말았다.     


오늘도 수많은 낙엽이 나풀거린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나뭇잎은 전부 떨어져 짓밟히고 가루가 되어 흙과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나풀거릴 것이다. 떨어져 이미 잿빛이 된 낙엽도 바람을 만나 높게, 그리고 낮게, 빠르고, 느리게. 어떤 낙엽은 사람과 운명처럼 만나 책 사이에 끼워져 나름의 영생을 누릴 수도 있고, 또 다른 낙엽은 우연히 떨어진 곳이 맨홀의 진흙탕이라 다른 낙엽과는 다르게 영원히 바람을 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맨홀 속의 낙엽은 진흙에 점점 몸이 잠길 것이다. 햇빛을 받지 못해 바람보다 차가워진 진흙 속으로 잠길 것이다.     


나는 맨홀 속 진흙에 잠겨 있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어젠가 비가 온 탓에 잔뜩 물을 머금은 흙이었다. 낙엽의 몸통을 진흙이 누르고 있었다. 내가 저기 있었다면 숨 쉬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겠지. 그래, 그럼 너는 이제 그냥 쉬는 거라고 하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풀거려 모래와 흙먼지를 맞는 녀석들과는 다르게 너는 이제 쉬는 거야. 나는 대답 없는 맨홀 속 낙엽을 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예고도 하지 않은 칼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제 수면 바지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다가 새로운 주제에 대해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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