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공허히 앉아 있곤 한다. 그것은 멍 때리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속으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져 스스로 그 많은 생각들을 의식할 수 없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면, 흡사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유의 끝은 무, 공허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모든 것의 전부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때를 떠올리라면 선명히 답할 수 있는 기억이 있다. 대학 시절, 목숨을 바쳐 연출했던 연극 작품의 마지막 날. 그렇게 바글대던 관객도 떠나고, 무대 위 먼지 쌓인 세트도 철거되고, 바삐 움직이던 팀원도 하나 둘 집으로 가면, 야속할 정도로 텅 빈 무대만이 남는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검정인 그 공간 너머 우두커니 앉아 나는 무얼 위해 내 목숨을 바쳤는가에 관한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서도 실루엣만이 남을 이 연극에 나는 왜 목숨을 바쳤는가 라는 생각은 '나는 연극을 왜 하는가?'를 넘어, '나는 무얼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낳았다. 갓 스물이 넘었던 작은 인간은 물음만 당차게 낼 줄 알지,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어찌할 줄 모르는 공허가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던 연극에 관한 의지를 꺾이게 만들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난다. 나는 그 공연을 마치고, 빠르게 입대를 했다.
삶은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단순히 바라보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닐까 라는 작은 답을 낸 것은 지극히 최근이다. 머리 위 굴비를 바라보며 간장과 밥을 먹던 사람은 그 굴비를 결국 먹게 되었을 때, 평소보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너무나 공허하다. 원한 것을 이루고 나면, 그리고 그 전율이 끝나면 누렸던 모든 것을 그대로 반납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초점 잃은 시선을 사방에 줄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무얼 위해 살아야 할까? 하며.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목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떠날 때, 이 세상에 특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이유로 황홀히, 찬란하게 나를 떠날 것 같지만 야속한 삶은 무덤덤히, 아주 차갑게, 당연한 것처럼 떠난다. 나는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에 앉아, 공허에 남은 떠난 삶의 잔향을 맡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모은다. 야속하게 떠나버린 향은 바람을 타고 점점 희미해지겠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내가 치러야 할 값이겠지만, 다시 목표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려야 함은 알겠으니 지금은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이 잔향을 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