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연출하게 되면서 여러 참고 자료를 찾다가 연출가 피터 브룩을 알게 되었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피터 브룩의 한여름 밤의 꿈 영상을 유튜브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라고 하면 정교하게 꾸민 무대에서 시를 낭송하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서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새하얀 사방의 공간, 현실에서 무엇에 쓰일 것 같은지 추측하기조차 어려운 오브제, 그리고 무대 위 살아 움직여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어딘가에서 찾아와 "진짜 셰익스피어는 따로 있었단다!"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아! 진정으로 시를 뱉기 위해선 거짓 한 톨 없는 본질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구나. 브룩의 연출 기법은 늘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연출 학도인 나는 그때 느낀 나름의 깨달음 이후로 광신도처럼 그가 말하는 연극 철학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연극 철학은 '단순함'에 있다. 무대 위에 일상적인 것과 꾸민 것들은 모두 배제함으로써 본질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연출가의 상상력과 상징성, 그리고 배우의 연기만을 남겨 요소의 색을 더욱 선명히 했다. 피터 브룩은 이러한 단순성을 '상상력은 수천 가지의 화려함을 정화하여 의미와 미의 정수만 남을 때까지 모두 벗겨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단순함'이어야 하지, 예술가의 '개성 없고 창조적이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지적했다. 의미와 미의 정수인 단순함! 나는 그가 자신의 철학에서 말하는 '수천 가지의 화려함을 정화'하는 과정과 그 결괏값인 단순함이 예술가는 물론이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본질을 잃어버리기 너무 쉬운 환경에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살아남기 척박한 세상은 우리에게 삶을 이어나가야만 한다는 생존 본능만을 더욱 발달시켰다. 그러나, 생존 본능 자체는 인간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브룩이 말하는 단순함, 즉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 가치는 어쩌면 삶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지켜져야 할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삶을 멈추어야 할 때가 오더라도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무언가가 있어야, 우리가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무엇이 내 목숨보다 귀중한 가치일까?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여럿 있지만, 떠오르는 그것들을 쉽게 믿어버리는 경계하라는 브룩의 말을 듣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된다. 사실, 떠오르는 그것들을 정녕 내 목숨보다 귀중하게 보는 것 자체를 의심하고 있지만.
아마 이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 숙제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는 철학도 있지만, 이 역시 경계하고 싶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의미와 미의 정수만 남은 단순함에 대해서.
피터 브룩은 올해 7월 2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 한여름 밤의 꿈은 물론, 이후 모든 예술 활동에 그의 철학을 부여(하고자)했던 나는 흘러 사라지는 인터넷 뉴스를 통해 그의 영면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적잖은 허무를 느꼈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가장 뜨거운 순간과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준 스승 중 한 명의 비보를 이렇게 마주하게 되다니. 의미는 무엇일까? 의미는 무엇을 남기는 걸까? 언젠가 치열한 삶 속에 허우적대느라 그의 철학을 잊어버리게 될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게 될까?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존경하는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