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을 잘 치고 싶은 원숭이는 숲에서 가장 큰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지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는 원숭이 옆으로 날개를 활짝 편 새가 스쳐 지나갔다. 새는 언제 원숭이 옆에 있었냐는 듯 하나의 점이 되었다. 원숭이는 물끄러미 점을 보다가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곤 나무 근처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보며 원숭이는 가슴이 뛰었다. 첨벙, 원숭이는 호수로 들어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제법 이리저리 헤엄 치던 원숭이는 자신이 헤엄을 잘 치는 원숭이라는 생각에 내심 만족했다. 해가 지고, 달빛은 호수를 비춰 은은한 색이 되었다. 햇빛의 따뜻함 역시 사라지자 호수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원숭이였다. 원숭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덜덜 떠는 몸을 부여잡고 열심히 헤엄을 치던 원숭이는 물 밖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이를 부정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더욱 헤엄을 쳤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지듯 원숭이는 더 이상 물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원숭이는 물에 뛰어들었던 속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빠르게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벌벌 떨던 원숭이는 달빛 아래 유유히 헤엄치고 있던 물고기 떼를 바라보았다. 원숭이는 평화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미 숲의 모든 것들이 새벽의 이슬을 머금고 있던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꿈이 뭐냐는 물음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멋진 직업의 이름을 대곤 했다.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다수의 어린이가 그랬을 것이다. 언급한 '멋진 직업'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나 멋진 판복을 입은 판사, 거센 불길을 단숨에 잡아내는 소방관, 나쁜 이들을 잡아가는 경찰, 우상인 학교 선생님과 같은 직업이다. 재밌는 점은 전국에 어린이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그들이 가진 직업적 목표(다시 말해 꿈)는 대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대부분 부모나 주변 어른, 혹은 미디어에서 위 직업들을 좋은 직업이라고 표현한 것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직업은 의심에 여지없이 너무나도 훌륭하다. 미디어나 어른들의 말처럼 멋진 모습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성장기를 지나며 반짝이게 묘사된 직업에 관한 목표를 잃게 된다. 잃는다는 표현보다는 놓아준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는 다 그런 거지.'라는 합리화로 이 현상을 매듭짓곤 한다(잠깐, 그럼 잃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야기해볼 부분은 어렸을 때 가졌던 직업의 꿈은 놓을 수 있어도, 그 꿈을 갖게 되는 현상(나는 이것을 목표 설립 사고 프로세스라고 칭한다)은 어른이 되어도 반복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보통 삶의 목표를 설립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뭘 잘하는지에 관해 여전히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일어난다. 오늘은 목표 설립 사고 프로세스에 관한 고찰과 나 스스로 잘하는 것을 찾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건 모두 다르다. 나아가서,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다르다. 잘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건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요소는 분명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잘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내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구축된다면, 본인이 가진 성향(능력)과 함께 놀라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환경과는 무관하게 현재 하고 있는 것이거나 할 줄 아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위에 언급한 어린이의 예에서 가져올 수 있다. 백지상태에서 어떤 환경을 구축할 때에는 첫 번째로 맞이한 외부적 요인이 전부가 된다. 환경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외부적 요인 즉, 환경에 따라 본인의 정체성을 구축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든 이는 환경이 결정한 운명대로 살 수 없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정말로 나의 능력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환경은 운으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위 질문에 관한 답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운은 작용하겠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게 주어지는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와 맞게 만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외부적 요인으로 이루어진 나의 목표와 상황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나의 흥미에 맞는지, 왜 이것을 하고 싶은지 등에 관한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싶지 않은지, 나의 흥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물음에 답을 하는 것 역시 이에 포함된다. 그것에 관한 탐구는 결국 불안을 일으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고와 행동을 한다. 즉,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뭐든지 불안에서 시작 된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목표 설립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본인이 처한 환경에 잠식되어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혹은 의식 조차)가 없거나, 현 상황에 불편을 느끼긴 했지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고통과 인내를 겪고 싶지 않거나, 불편을 느끼고는 있지만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는 상황이거나.
중요한 것은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온전히 구현한다면, 우리는 자신 스스로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인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이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능력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에 관한 부분을 설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환경에 있거나, 맞이하게 되더라도 '잘할 수 있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