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동글이가 올해 만으로 여덟 살이 되었다. 녀석의 생김새는 몇 가닥 없는 콧수염이 하얗게 센 것 빼곤 어릴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가끔 헛구역질하고, 오래 뛰지 못하고, 잠자는 시간이 길어지는 걸 볼 때면 나는 녀석과 보내게 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나쁜 생각을 하게 된다. 얌전히 거실에 앉아 있는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오래 산 강아지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녀석의 표정엔 많은 것이 담겨있는 듯하다.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것일까? 어떤 생각으로 보는 것일까? 아마 녀석도 본인을 왜 쳐다보는지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참으로 아쉽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만 알아도 좀 더 잘해줄 텐데 말이다.
노견이 되어가는 동글이 이야기는 엄마와 종종 나누는 편이다. 항상 엄마는 절대 보낼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를 접는데, 나는 그럴 때면 조금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내가 주로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다. 자주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마냥 외면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엄마에게 인식시켜주고 싶었다. 참으로 잔인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그냥 이제는 하루하루를 값지게 보내야지.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겠지.
오늘도 동글이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를 매듭지으며 했던 말이다. 엎드려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녀석을 나 역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눈을 마주쳤다. 나는 얌전히 뻗어있는 그 조그마한 앞발에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나는 녀석의 발의 촉감을 온전히 느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정적과 함께 내 속에서 정체 모를 울컥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녀석과 한 그 짧은 스킨십을 생각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분명히 내 속에서 발현된 찌릿함은 녀석과 내가 닿았을 때 생겼다. 그렇게 방 안에서 의자에 앉아 스킨십에 관한 생각을 했다. 스킨십은 나와 녀석에게 어떤 의미로써 작용한 것일까?
여기까지 쓰고, 1년이 지났다. 아마 산으로 가는 스킨십 내용을 쓰다가 잘 풀리지 않아 접은 원고일 테다. 미완성 원고들을 정리하다가, 이 글은 완성하고 싶어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다. 2022년의 동글이는 여전히 하얀 수염을 가지고 있다. 만으로 아홉 살이 되었고, 두 자릿수 나이를 바라보는 시점이 되었다. 요즘에는 예전만큼 동글이와 이별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제는 나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오해할까 싶어 첨언 하자면, 동글이는 여전히 건강하다. 현관문 앞에 택배 아저씨, 배달 기사님 오면 왕왕 짖으며 밥값을 하고, 간식과 밥을 줄 때면 입꼬리가 귀에 걸려 깡충깡충 뛰는 것도 여전하다. 녀석과 함께하는 1년은 정말 큰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과연 그 시간을 밀도 있게 보냈는가에 대해선 솔직히 자신이 없다.
요즘은 유독 오감에서 빚어진 경험을 되새김질하는 경우가 잦다. 되새김질이라고 함은 소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내가 의미하는 것은 과거에 했던 오감의 경험을 현실로 끄집어내어 온전히 그 순간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의 모습과 촉감, 온도와 냄새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되새김질 속 순간을 자꾸 느끼려고 하는 이유는 시끄럽고 복잡한 머리와 세상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꿈속에서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세상과의 온전한 단절로 작용하고 있다. 되새김질의 시간은 내가 가진 인상 깊은 기억 중에서도, 다시 경험하지 못할만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어릴 적 오래된 시골집에서 맡은 녹진하고 고소한 냄새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대화가 그렇다. 아마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동글이와 했던 많은 순간을, 저 위에 언급했던 찌릿한 울컥거림을 포함한 많은 순간을 되새김질 할 것이다. 그러려면 후회는 그만하고 녀석과의 시간을 밀도 있게 써야겠지. 왕왕 짖는 모습도, 깡충깡충 뛰는 모습도 보드라운 털과 콤콤한 발냄새도, 오랫동안 되새김질할 수 있도록, 녀석과의 시간을 밀도 있게 써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