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경 Aug 20. 2022

귀뚤귀뚤, 이상한 계절

제가 가는 헬스장 뒷문 길은 늘 쓰레기로 가득했어요. 헬스장은 병원이 모여있는 건물, 이른바 '병원 타워'라고 불리는 곳 지하에 위치했는데, 병원도 헬스장도 사람의 발길이 잩다보니 뒷문의 쓰레기는 늘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원래는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어느 나라든 가로수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것을 허락하진 않을 테니까요.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의 한 구석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요. 이미 오물을 잔뜩 뒤집어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펫말과 널브러진 담배꽁초, 종량제 봉투 동산의 풍경은 이젠 낯설진 않죠. 그저 눈살만 찌푸려질 뿐.


저는 이 뒷문 길을 헬스를 다니기 전부터 자주 오갔어요. 이 길은 지하철 역이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어요.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환경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이곳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고물상에 팔 수 있는 쓰레기를 뒤적거리는 어르신을 가장 자주 볼 수 있었어요. 특히 무더운 날 아지렁이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는 어르신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사실 늘 길을 가다 그 광경에 잠시 시선을 멈추게 되지만, 이내 다시 걸음을 이어가곤 해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나?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면 시선을 주는 것 마저 실례다, 라는 생각이 컸죠. 그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마음으로만 연민할 것이라면, 시선을 주는 것이 조심스러운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상대가 누가 되었든 말이에요.


아무튼, 오늘 헬스가 끝나고 집에 오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쓰기 위해 엉뚱한 길로 샜네요.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운동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이미 밤은 어둑해져 있었어요. 올해는 특히, 너무나도 더웠다고 생각하는데요(늘 그 해가 제일 덥죠?). 말복이 지나고 드디어 제가 가장 사랑하는 늦여름밤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가 아직 식지 않은 대지의 열과 만나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늦여름 밤. 운동도 했겠다, 기분 좋게 프로틴 셰이크를 사 먹으러 헬스장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제 앞에 고물을 가득 담은 유모차를 끌던 할머니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줍기 시작했어요. 저는 무엇을 줍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그 모습을 쳐다봤죠. 바닥에는 폐건전지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었고, 할머니는 이를 주워 건전지를 모아놓은 투명 비닐봉지에 넣고 있었어요. 저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그저 이 나라의 복지 시스템을 속으로 탓하며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할머니를 가로질렀어요. 할머니를 가로지르자 복지를 향한 분노는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얄궂게 사라졌죠. 그렇게 편의점에 도착해 단백질 셰이크를 사 먹으려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 물과 핫바, 감동란을 계산하다가 가진 돈이 부족해 감동란을 빼는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대학생 시절, 오백 원 천원이 모잘라 음식을 빼던 제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어요. 저는 감동란을 계산해주고 싶었지만, 용기를 낼 수 없었어요. 왜일까요? 이번엔 행동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는데, 왜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일까요? 학생은 핫바와 물을 빠르게 계산하고 편의점을 빠져나갔어요. 저 멀리 사라지는 점을 보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감동란을 사서 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왜일까요? 일면식도 없는 덩치 큰 어른이 난데없이 공짜 감동란을 주면 위협적으로 볼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정말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더 웃픈 건 제가 그 순간, 방금 말한 생각에 스스로 설득을 당해버렸다는 거예요. 합리화예요. 물론, 제 생각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곤 있지만 너무 쉽게 설득을 당해버린 순간부터 이건 순수하게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없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금은 시무룩한 채, 저 역시 편의점을 나섰습니다.


편의점에 나서니, 아까 건전지를 줍고 있는 할머니가 구석 한편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계셨어요. 저는 그 모습에 더 이상 합리화는 그만, 이라는 마음으로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바나나 우유와 빨대를 구매했어요. 그리고, 작은 용기를 냈어요. 


할머니는 극구 사양했어요. 괜찮다고, 학생 먹으라고. 여기에 두고 갈 테니까 괜찮으시면 드세요, 하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할머니께서 "너무 죄송해서..."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무엇이 죄송한 것일까요? 미안한 것도 아니고 무엇이 손자뻘 쯤 되는 제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죄송할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어요. 저 멀리서 할머니의 고맙다는 음성이 들렸지만 빠르게 도망쳤어요. 마치 죄를 진 사람처럼요.


귀뚜라미도 울고 매미도 우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땅이 어우러지는 이 이상한 계절이 저는 좋아요. 집에 가는 길에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울었어요. 저는 용기 내 좋은 일을 했다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집으로 도망치는 길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무엇이 제 마음을 이토록 이상하게 만든 것일까요? 귀뚤귀뚤, 이상한 계절과 이상한 내가 기억에 남았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피터 브룩을 떠올리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