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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금요일 밤에 떠난 여행은 잠시 현생의 짐을 벗게 해 줌과 동시에 새로운 배낭을 짊어지게 했다. 떠나기 30분 전에 부랴부랴 싼 짐에는 뭘 빠트렸는지 고민했어야 할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증거로 나는 잠잘 때 입어야 할 옷 하나 챙기지 않았는데, 덕분에 나는 여행하는 내내 알몸으로 잘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덤벙거림에는 여행 자체에 큰 의미를 담기보다 여행의 장소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며 이유모를 위안을 스스로 부여한다. 덕분에 기분이 상하진 않았으나, 기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바람이 잔뜩 부는 강릉역의 늦은 밤, 나는 검은 하늘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의 미미한 바다내음에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언제 그렇게 검은 하늘이었냐는 듯, 다음 날 강릉의 하늘은 쾌청했다. 가을 하늘, 역시나 어딘가에서 풍기는 바다내음을 맡기 위해 나는 고개를 돌렸다. 택시를 타고 안목 해변을 불렀다. 높지 않은 건물의 풍경을 처음 본 것이 아님에도 낯선 이유는 오늘의 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을 가진건 아닐까. 나 자신에게 느끼는 낯섦은 내 존재를 인식하는 데 있어 적잖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어제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일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나 자신을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정녕 그렇게 느낄 때는 살면서 얼마나 될까. 낯섦의 공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만들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이방인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주말 오전, 시월의 안목 해변은 덥다고 느껴질 만큼 따가운 햇빛이 인상 깊은 해변이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모래가 쌓인 땅을 밟았다. 신고 있던 에어포스를 벗고, 양말을 그 안에 구겨 넣고, 맨발로 모래를 지르밟으며 역시 낯섦을 느꼈지만 혹시 이 안에 뾰족한 유리 파편이 있진 않을까 바보같이 겁먹은 탓에 이후엔 아무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적당한 위치를 찾아 모래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어제 불었던 검은 하늘의 바람이 파도 속으로 스며든 듯, 녀석의 움직임이 꽤 세찼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검은 옷을 입은 등이 햇볕에 익을 정도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이즈 캔슬링을 켠 뒤,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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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이었던 나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업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60명 남짓 되는 대부분의 동기가 그러했는데, 단순히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에게 특출 난 제자로써 보이고 싶은 욕망이 컸던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 후자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고, 이는 동기들도 동감하지 않을까 싶다(이 글을 내 동기가 본다면,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리 열심히 했는지 공유해주길!).
그와 스승과 제자로 만난 첫 번째 수업은 화술 수업이었다. 학기 초, 그는 하나의 과제를 내주었다. 과제는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해 다음 주 수업까지 화술 수업을 통해 어떤 것을 이루고 싶은 지에 관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과제를 듣고 카세트테이프 녹음기는 고사하고, 애초에 요즘 테이프를 구매할 수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당시에도 이 과제가 생뚱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위에도 잠시 언급했듯 매우 수업에 열정적이었던 신입생들은 결국 카세프 테이프와 몇 대 없는 녹음기를 구해 돌려가며 과제를 해냈다. 재밌는 점은 의외로 카세트테이프 자체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아주 쉽게 구매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내준 이 과제가 십 수년 전부터 꾸준히 신입생에게 냈던 과제였기 때문에 매년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문방구 측의 판단 덕분이었다.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구나, 하고 신기했던 신입생의 나는 그 배경까지 생각할 지혜는 없었다. 물론, 그런 지혜가 없었기에 빛났던 날이었음은 분명하지만.
60여 명의 동기가 3~4개 정도 되는 녹음기를 쓰기 위해 차례를 정했다. 그렇게 녹음기는 누군가의 손에서 누군가의 손으로, 전해지고 전해져 얼마 뒤 내 손에 오게 되었다. 나는 화술 수업의 목표가 적힌 종이를 녹음하기 전에 열심히 연습했다. 아직 봄의 서리가 남아있는 2015년 3월의 어느 밤, 아무도 없는 기숙사 책상엔 하나의 스탠드가 켜져 있었고, 그 안에 잔뜩 웅크린 채로 종이를 읽는 내가 떠올랐다. 이쯤 되면 준비가 되었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삼다수를 벌컥 들이켰고 심호흡을 두 번 한 뒤 카세트테이프가 있는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그리고 첫 운을 띄웠다.
과제를 제출하고, 얼마 뒤 수업 시간에 그에게 테이프를 돌려받았다. 왜 돌려주신 거지? 하며 의아했지만 얼마 뒤 몇몇 동기들에게서 테이프 말미에 그의 답신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가 어떤 말을 남겼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당장 테이프 속 음성을 듣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테이프 속 그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 이유는 사실 핑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시기에 누구에게 녹음기를 다시 빌려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학교 생활과 겹쳐진 생업을 치르기 위해 정신없는 삶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음성이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는 기숙사 테이블 구석에서 어느 상자로, 상자는 흘러 흘러 우리 집 어딘가로 정착하게 되었다. 테이프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상자의 구석에서 7년의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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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과제 잘 들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방송연기학과 19기 A반 김일경입니다." '연기'라고 정확하게 발음해주셨네요. 잘하셨습니다.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화술의 장점은 정말 제 나름대로 정말,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 이거야 말로 그 누구도 갖기 힘든, 그 어떤 장점 보다도 두드러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과목이 화술이기 때문에 화술적으로, 문법적으로 따져 보자면... '제가'는 주어죠. 주어는 주어임을 드러내는, 살짝 멈추거나 띄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끊어 읽기를 하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하며 가도 괜찮지만 정확하게 한다면 "제가" "생각하는", 이렇게 말이 되겠지요? 그다음에 '정말'이라는 단어는 부사입니다. 부사는 강조를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에 앞과 뒤를 띄워야 합니다. 네, "제가 생각하는 제 화술의 장점은", 띄고, "정말", 띄고, "제 나름대로", 띄고, "정말", 띄고,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이런 식으로 딕션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다음에 '정확하다'. '정'은 장음이라는 것. 그래서 오히려 '정확' 이라기 보단 '즈엉'에가깝습니다. '즈엉확'하게, 이렇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래 표준 발음입니다.
다음, "원래는 발음이 되게 뭉개지고 시옷 발음도 잘 안됐었는데", '안되다', '안'에 강세를 넣길 바랍니다. 말을 할 때 부정적인 표현은 그게 부정적이라는 것을 듣는 상대방에게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살짝 강세를 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있다'의 부정적인 말은 '없다', '된다'의 부정적인 반대말은 '안된다', 부정적인 표현, '안된다'. '하라'의 반대 표현은 '말라'죠. '하지 말라'. 이런 말들. '안된다', '없다', '말라', '못한다'. 이런 말들은 강세를 넣어야 하고, 살짝 강세를 넣어서 말하면 그 단어가 장음이 되는 것입니다. 장음화. 어떤 단어든지 강세를 넣으면 원래 장음이 아니었던 단어조차도 장음이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옷 발음도 잘 안됐었는데", '안'에 강세를 넣으라는 것이죠? '잘'이라는 것은 영어로 'well', 이것도 부사입니다. "시옷 발음도", 띄고, "잘", 띄고, "안됐었는데", 이런 식으로 발음하셔야 합니다. "시옷 발음도 잘 안됐었는데, 제가 공부를 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한 게 나름대로 제 장점이 된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장점입니다. 예, 마음 깊이 격려와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리고', 연결 부사죠? 띄고, "제가 생각하는 제 화술의 단점은, 제가 말이 너무 빨라서", '말', '말'이라는 단어는 지난 수업에 장음이라는 것을 배웠죠. '말'. "말이 너무 빨라서 평소에 말할 때도 버벅대거나 말끝을 흐릴 때가 되게 많다는 것입니다." 많다. 말이 장음이라 했죠? 많다도 장음입니다. "이 단점은 앞으로 교수님께 4년 동안 배우면서", '4'가 장음이라는 것. 수업 시간에 배웠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이니까 강세를 '아'에 둬야겠죠. 그러면 '아'가 장음이 되는 것이지요. "아니면 교수님께 짧게 1년 동안 배우면서", 일! 이 아니라 '일 년'. "교수 님께 일 년 동안 배워가면서 제가 정말", 정말은 부사죠. 강세를 넣고, 부사라는 단어를 강조를 주기 위한 단어니까. "제가 정말, 정확하게 정확하고 안 틀리도록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게, 고쳐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훌륭한 다짐입니다. 오늘의 이 다짐이 변함없이 일생동안 화술, 말을 구사할 때, 말과 관련된 일을 할 때, 일생동안 효력을 발생하면서 그대를, 가장 훌륭한 화술을 하는 배우로, 그런 훌륭한 말씨를 쓰는 자연인으로 성장시켜줄 것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라는 단어는 장음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느낄 감. '감사', '감동', '감격', '감화', '감탄사' 전부가 장음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 과제 잘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단점을 알고 그걸 고치려 노력하는 것. 천천히 말하고 정확하게 말하려는 그런 노력. 정말 훌륭한 태도이고, 그런 훌륭한 노력이 결국에는 훌륭한 화술 구사하는 좋은 배우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정말 멋진 그런, 언어적인 면에서 아주 멋진 노력을 하고 있는 훌륭한 그런 자세.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사를 보냅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시길 바라고, 과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녹음기를 찾지 못해 테이프를 듣지 못했던 스물의 못난 학생은 7년이 지나 음성을 파일로 변환해 핸드폰으로 듣는 사람이 되었다. 파도의 거친 소리가 묵음이 되고, 얼마 뒤 흘러나오는 어린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음성이 너무나도 낯설어 실소가 나왔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떨림이 은은히 뭍은 열정이란. 그렇게 짧은 발표가 끝나고, 지직-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그렇게 고대하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와의 조우. 그가 해준 세심한 코멘트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수평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느껴지는 이곳은 동해의 안목 해변이다. 내가 밟은 이 땅이 수평선의 너무나도 작은 일부 중 하나겠구나, 저 바다가 날 당장 삼켜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겠구나, 이곳은 그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너무나 작은 사람이다. 너무 작아서 파도에 휩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찰나의 순간이라도 바뀔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신기루처럼 없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많던 연극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연극에 목숨을 바치겠다던 신념은 어디로 갔는가? 연극을 떠난 나는 내게 연극을 가르쳐준 그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디서 나오는 설움 인지도 모른 채 아기처럼 엉엉 울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단점을 알고 그걸 고치려 노력하는 것. 노력. 정말 훌륭한 태도이고...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사를 보냅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시길 바라고, 고맙습니다.
저는 이렇게 변하는 게 너무 무섭습니다. 제가 변하고 있는 게 무섭습니다. 제가 더는 떨리지 않는 사람이 될까 봐 무섭습니다. 온갖 허례허식에 쌓여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될까 무섭습니다. 너무 빨리 말하는 저는, 너무 빨리 살아가는 저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제게 무슨 말을 해주실까요. 이젠 당신이 해줄 법한 말이 점점 떠오르지 않게 되는 제가 너무 속상해서, 더 변하기 전에 당신을 만나러 오고 싶었습니다. 이 낯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어폰을 빼고 다시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매서운 파도가 인상 깊었다. 햇볕에 익어 후끈 거리는 등이 이젠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어나자. 툭 털고 일어나 해변 건너로 걸어가는 나는 뭘 가지고 가는 지도, 누굴 만나고 가는 지도, 뭘 고백하고 가는 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빠르게,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