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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경 Dec 24. 2021

카스

냉동식품을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면 최소한 덥지는 않겠다면서, 감히 ‘효율’을 따졌던 팔월의 내가 공장에서 가지고 나온 건 노동력을 딱 얄궂게 인정받을만한 돈과 피부병이었다. 피부병 같은 경우, 얼굴에 각질이 일어나면서 파충류가 허물을 벗듯 조금씩 피부 표피가 떨어지는 증세를 보였는데, 처음에는 무엇이 원인인지 몰라 그 시점에 새롭게 바꾼 베개를 탓했다. 어머니는 고급지고 비싼 베개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내 의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피부병의 원인은 냉동 창고의 차가운 온도와 여름 바깥의 후텁지근한 온도를 반복해서 겪은 탓으로 밝혀졌다. 가벼운 동상. 피부가 고장이 났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면서 의문은 해결되었다. 나는 진료를 받은 뒤로 더는 공장에 나가지 않았다. 참으로 고독했다. 그것은 단순히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춥고 힘든 일을 하는 내 신세를 한탄하는 것을 넘어 내가 고생을 하겠다고 자청하는데도 일을 하지 못하는 나의 현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희생만 한다면 뭔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의 허영은 점점 나에겐 허락되지 않겠구나. 가지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던 내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걸 잃어가는 것을 슬퍼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번 주 회사의 주 업무는 설문 조사와 인터뷰 중간쯤 하는 것을 하루에 여덟 명씩 진행하고, 이를 정리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인터뷰의 주제는 자기 계발에 관련한 것이었다.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있는지, 한 적이 있다면 어땠는지, 자기 계발을 왜 하는지에 관한 것들.


인터뷰의 결괏값을 보며 참으로 흥미로웠다.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부분은 시간이 없어서 자기 계발을 못 하고, 우선순위에 밀려서 못(안)하고, 근본적으로 귀찮아서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대로 자기 계발을 하는 사람들은 미래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해야 할 시기(취업, 시험 등)라서, 남들이 다 하니까 라는 대답을 자기 계발을 하는 이유로 꼽았다. 내가 말하는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나온다. 자기 계발을 하는 이유와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공통점. 참으로 모순적이다. 하며 허허실실 웃다가 자연스럽게 그 모순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다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지는 순간처럼,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묵혀온 질문을 꺼내 들고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은 무얼까?     


이 시점에 뚱딴지같은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돌아가신 나의 은사님께선 ‘연기를 잘하는 방법’에 관한 강의를 할 때 항상 꺼내는 말씀이 있었다.

연기를 잘하기 위한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아침에 일어나고, 아침밥을 챙겨 먹고, 먹었으면 일어나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나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아야 한다. 그리고 일찍 잠들어, 잘 자야 한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그저 ‘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한 데서 고민하지 말고 삶을 잘 살아라. 그것이 연기를 잘하는 방법이다.      

어떤 이유로 일찍 퇴근하게 된 날, 공덕역에서 마포역까지 쭉 걸었다. 마포역에 다다르니 저 너머 마포대교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나는 굳이 이유도 없는 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체력이 남아돌았느냐? 전혀. 피곤함에 절었다면 절었지, 체력은 이미 동난 상태였다. 마포대교에 발을 디딜 때까지도 여기를 걷고 있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른쪽의 노을이 어느 높은 건물 아래로 점점 사라지고 있던 때였다. 가을을 머금은 한강 바람이 불었다. 나는 오른쪽의 노을을 응시하다가 이내 왼쪽의 풍경을 보았다. 빨간 구름과, 검은 하늘, 그 둘이 오묘하게 섞인 강과 홀로 떠 있는 달을 보았다. 오른쪽의 해와 왼쪽의 달, 나는 영문 모를 걸음을 계속했고, 여의나루에 도착하자 이내 밤이 되었다. 구석 어딘가에 앉아 먹었던 카스가 참으로 맛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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