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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경 Dec 24. 2021

그와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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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첫 만남은 목소리와의 조우였다. 갓 스물을 넘긴 나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무대 위 작은 인간은 감히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연기 시연이 끝나고 바짝 얼어붙은 나에게 어둠 속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프(세일즈맨의 죽음, 아서밀러)를 준비했구나,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냐, 운동 좋아하냐, 그래 무얼 타고 왔니, 효도해라.     

그와 스승과 제자로 만난 첫 번째 수업. 카세트테이프에 나의 화술을 녹음해오라는 과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잔뜩 긴장하며 학교생활을 하던 새내기의 나에게, 이걸 굳이 이렇게? 라는 물음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테이프를 녹음하는 카세트 기계를 60여 명의 동기와 돌려쓰며, 나의 녹음을 완성했다. 아마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테이프 녹음이었으리라. 아무도 없는 기숙사 책상에 앉아 단어와 문장이 쓰여 있는 종이를 들고 배운 대로, 딱딱하게, 그러니까, 바보같이 말을 읊어댔다. 얼마 후 그는 카세트테이프 뭉치를 한 아름 들고 수업에 나타났다. 각자의 테이프를 가져가거라. 60여 개의 테이프 속엔 그가 남긴 과제의 피드백 음성이 있었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정성을 들여, 축복과 함께 남은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      

얼떨결에 그가 담당하는 연극 제작 수업에 연출을 맡게 되었다. 20살 막내. 30여 명이 참여한 팀의 리더. 당연한 이야기지만, 많은 문제를 낳았다. 적도 많이 만들었다. 술을 마시며, 선배는 연출은 잘해도 중간, 중간을 해도 욕을 먹는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나는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집중을 했다. 물론 내 모든 것을 쏟아도 많은 것을 담지 못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연신 쏟아지는 비라 할지라도 내가 담을 수 있는 건 간절히 모은 두 손바닥 위 작은 물웅덩이뿐이다. 아마 팀원들끼리의 충돌로 인해 연습을 진행할 수 없었던 날, 공교롭게도 그날은 제작 수업 날이었고, 나는 그에게 오늘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작은 연출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송구하다는 말씀뿐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뒤 받은 답장. 예술보다도 중요한 게 삶 그 자체임을 잊지 말자. 인간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스마트 폰을 다루는 것이 어색한 그가 문자의 단어 하나를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를. 그 이후의 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 항상 그 문자를 대본에 손수 옮겨 적는다.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삶, 인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 그가 보낸 장문의 조언은 오늘날까지 내 삶의 신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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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되고, 덜컥 군대에 가게 되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날짜에 군대에 가는 동기 두 명을 불러 서점에 데리고 갔다. 그는 군에 들어가 꼭 많이 읽고 나와야 한다며 나와 내 동기들에게 책을 한 아름 사주었다. 잘할 수 있다고, 건강히 돌아오라고 그는 말해주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종의 기원, 파리대왕, 데미안. 고전의 명작만 읽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오묘한 조합의 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가 사주었던 수많은 밥과 술보다 그 네 권의 책 선물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따뜻한 그의 마음은 나이를 떠나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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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말뚝을 박기로 했다. 군에 있을수록 연극의 갈증은 더욱 차올랐지만, 동시에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펙에 이 정도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직업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철이 들었다고, 현실을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어린 군인 아저씨에겐 진리였다. 겨울에 휴가를 나와 학교 공연을 보러 갔다. 가장 그리운 곳으로 가는 건 연어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마주쳤다. 나는 깍듯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악수를 청했고 나는 선뜻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잡은 손을 꽉 잡고 나에게 말했다. 군에 말뚝을 박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너 같은 인재(그는 모든 학생을 치켜세웠다)가 군에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잘 생각해라. 나는 언젠가 그가 학생 대다수가 수업에 오지 않거나, 연습 시간을 어겼을 때 내었던 낮은 분노를 악수 속 목소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죄책감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이지? 물론 그 사건 때문에 말뚝 선언을 철회한 건 아니었지만, 그 악수 덕분에 나는 다시 연극의 불을 지필 수 있었다(동아리를 만들고, 연극 대회를 나가 우승했다). 그것은 잃어버린 내 자아를 찾게 해주었다. 반복되는 삶과 아무것도 없는 첩첩산중에 묻힐 뻔한 나의 자아. 그래, 나는 연극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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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지 않았던 유일한 해다. 나는 군대에 전역하고, 모종의 이유로 학교를 조용히 다녔다.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묻어 버릴 만큼. 그와의 조우가 더는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와의 관계를 넘어서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때였는데, 참으로 고독했다. 버려지듯 사회로 돌아와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지핀 연극의 불꽃도 어디에다 옮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알지 못했는데, 그때 가장 많이 읽고, 공부했던 것이 그가 가장 특별하게 생각했던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그가 말하길, 세계에서 딱 한 작품의 희곡을 챙겨야만 하는 재난이 발생한다고 했을 때, 본인은 주저 없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선택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꽤 인상 깊게 들었다. 그렇게 그 말에서 파생된 고도를 기다리며는 나에게 베케트의 부조리는 물론, 나아가 실존주의, 허무주의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읽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상은 현재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 색의 기본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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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지도교수로 있는 극작 동아리에 들어갔다. 우리 학과에선 오랜 전통이 있는 동아리인데, 대부분 많은 구성원이 그의 가르침을 더 듣기 위하여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거기서 그가 직접 번역한 베케트의 단편집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유일한 베케트 단편집의 한글 번역본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되고, 그의 베케트를 알게 되고, 더 관심이 생겨 그의 동아리로 들어가 베케트의 단편집을 보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때는 그저 이런 작품이 있구나. 하며 넘어갔던, 이해를 전혀 할 수 없는 희곡이었지만, 얼마가 흐른 미래의 나는 그때 읽은 작품으로 새로운 목표를 계획하고 있다. 삶은, 감히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어느 날,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회식을 한 적이 있었다. 학기 초,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명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가장 나이가 많았던 선배였다. 회식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나를 치켜세우며(다시 말하지만, 그는 모든 학생을 치켜세운다) 신입생에게 소개했다. 나는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는 선배와 후배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상호 간의 예의를 지킴으로써 시너지를 유발하고, 화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는 꼭 후배가 있는 자리에선 존댓말과 함께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러주었다. 나의 부모보다 어른인 사람이, 나에게 존칭을 하며 자신을 낮췄다. 그 겸손의 미덕을 감히 느낌으로라도 배울 수 있어서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여담으로 그 회식 자리는 더치페이로 진행되리라 생각했지만, 늘 그가 그랬듯 결제는 아무도 모르게 본인이 해결했다. 후배들에게, 일경 선배님이 결제를 해줬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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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작품을 준비했다. 해가 바뀌기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 다음 해 여름에 올릴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내 학교생활의 모든 것이 그 작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슬프게도 그 해는 그를 학교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전, 이미 공식적으로 은퇴를 했던 그는 정부의 지침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더는 교단에 설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실을 정리하는 날, 학과의 많은 인원이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돕기 위해 학교에 방문했다. 업무는 단순했다. 그의 짐을 정리하여, 근처에 있는 원룸 자취방에 옮기는 것. 그리고 그의 연구실엔 수천, 아니 수만 권의 책이 나왔다. 나는 군에 가기 전,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장정 열댓 명이 붙어 책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 가고 그는 작업을 도와준 학생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감사하다, 고맙다고 말하는 따뜻한 말은 여전했지만 나는 왜 마음이 아팠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의 공연에 보러온 여름의 어느 밤, 정말 많은 긴장을 했다. 그가 내 공연에 온다니! 그를 보지 못한 지 몇 개월이 흐른 때였다. 공연이 끝나고, 참여한 스태프와 연출, 배우가 무대 위로 올랐다. 배우 넷, 연출 하나, 스태프 하나. 단출한 인원이었다. 그는 무대 위 개개인에게 덕담과 함께 피드백을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나의 차례. 그는 잠시간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잠시 이곳에 침묵이 흘렀다. 5년 전, 그와 처음으로 마주한 목소리와의 조우를 다시금 겪을 수 있었다. 여전히 내 눈동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기 시작하는 목소리, 나에게도 같은 덕담이었다. 김일경 연출이 4년의 세월을 지나 완성이 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의미는 가지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던가. 나는 다르지 않은 덕담임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저를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얼마 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교단에 다시 서지 못한 충격이 그에겐 큰 고통이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여름밤 무대 위 그와의 조우를 마지막으로 더는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12월,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어느 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동기와 함께 그의 빈소에 방문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흔적이 빈소에 가득했다. 나는 어떠한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보관하고 있던 그의 정년퇴임을 기념하기 위한 논문집을 꺼내, 맨 앞에 있는 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모두 나처럼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들의 축사였다.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연결되는 관계가 있다고 믿는가? 나는 믿는다. 다만 그런 꿈같은 이야기도, 모든 건 영원할 수 없다는 한계는 넘을 수가 없다. 축사를 읽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계속해서, 머리가 터질 듯 아프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삶, 인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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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그와 동아리에서 읽었던 베케트의 단편집이 떠올랐다. 베케트의 단편집 중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것은 배우를 인물이 아닌 오브제로 구성하여 연극에 내보이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이것이 AI, 메타버스 등 기술이 인간과 같은 지점에 서는, 혹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시점인 오늘날의 특이점과 재밌는 공통점, 모순 아닌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을 기술화했던 베케트, 기술을 인간화(혹은 신격화)하는 오늘날의 접점. 그것을 오늘날의 기술을 함께 연극으로 풀어냈을 때,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까? 베케트가 2021년에 살았다면, 그는 어떤 희곡을 썼을까. 나는 그런 베케트의 단편집 중 하나를 현대로 가지고 와 리메이크를 진행할 계획에 있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작업을 시작하지 않을까. 나는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방법은 단순 추억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준 연극의 불꽃을 다른 사람에게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작품이 다음 사람에게 연극의 불꽃을 지필 수 있을까?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은 행동으로 취할 차례다.


어제, 친한 후배 D와 함께 그가 쉬고 있는 용인에 방문했다. 참으로 좋은 터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의 위치가 적힌 지도를 받았음에도 워낙 땅이 넓었기에 꽤 애를 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를 찾게 되었을 땐 나와 D는 기쁨도 잠시 금세 숙연한 태도를 보였다. 이 작은 공간에 계시는구나. 얼마간 정적이 흐르고 D는 나는 아직도 못 믿겠어. 라고 말했다. 그리곤 그의 반대편에 걸터앉아 변하지 않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와 D는 학교 이야기를 했다. 11월 말이었지만, 해가 비춘 덕에 아직 따뜻했다. 가자. 교수님 또 올게요. 꽤 시간을 보내고, 나와 D는 자리를 떠나기 위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그가 있는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는 괜찮은가요? 잘 쉬고 계시는가요? 의미는 가지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던가.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아마 살아갈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살면서, 그가 남긴 흔적과의 또 다른 조우를 기대하며, 기다리며, 나는 나의 고도를 만나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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