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힘든 이름 석자

내 사랑 순이

by 지구별소녀

초등학생 시절.

학기 초가 되면 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나눠주셨다.

저학년이었을 때는 종이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도 잘 모르고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다. 그러면 아버지는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시며 손으로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셨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자 이 종이를 부모님에게 보여드리는 게 점점 싫어졌다. 부모님의 학력을 적는 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가족 관계와 부모님의 교육 수준을 알게 되면 그 학생을 파악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받는 서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류를 부모님께 일 년마다 한 번씩 내미는 것이 어쩐지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들었다. 두 분 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부모님께 이 서류를 건네지 않고 두 분 다 중학교 졸업이라고 살짝 부풀려서 적어서 제출했다.


부모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본인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학교에서 멀어져만 갔다. 배움과 멀어지고 생계와 가까워질수록 늘 학교가 그리웠고 배움에 대한 갈증과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엄마는 어린 여동생을 돌보느라 국민학교 3학년 때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도 못 가고 애지중지 돌보던 인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동생은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애석하게도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엄마는 대화를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셔서인지 맞춤법이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척척 외우시고 장사를 하실 때 암산으로 계산을 하시는 똑소리 나는 엄마이지만 은행 ATM 기계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통장에 돈을 넣고 빼는 간단한 일조차 배우기를 거부하셨다. 아마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많이 어려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엄마 대신 은행 심부름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돌보는 보호자였고 나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경제적인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야채가게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손님에게 물건을 팔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엄마의 노력에 비해 엄마가 거두는 경제적인 결실은 어린 내 눈에도 너무나 적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공부 열심히 해."라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장사를 하시다가 지친 표정으로 힘없이

"정림아, 너는 커서 펜대 잡고 사무실에서 일해. 엄마처럼 몸으로 먹고살지 말고..."라는 말을 곧잘 하셨다.

"엄마처럼 몸으로 먹고살지 말고..."라는 말은 어느 순간 화살처럼 날아와 내 뇌리에 콕 박혀버리고 말았다.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부모님이 백 번 말씀하시는 것보다 장사를 하느라 지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나에게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의 가뭄 같은 인생에 단비를 내려드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길에서 장사를 하는 엄마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무더위에 아스팔트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도 강추위에 손과 발과 얼굴이 꽁꽁 얼어도 나를 가르치려고 뒷바라지를 하시는 엄마에게 선물을 꼭 안겨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마음속으로 '시원하고 따뜻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펜을 잡고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장사로 인해 엄마의 손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굽어갈수록 허리가 할머니처럼 굽어질 무렵.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엄마의 바람대로 졸업 후에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엄마를 한글을 배울 수 있는 주부학교에 보내드려서 어린 시절에 못다 이룬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나이 25살에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엄마는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되셨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아쉽게도 엄마의 한글 공부의 꿈은 또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엄마가 장사를 하면 할수록 적자의 폭이 커져서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을 일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도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으려면 써야 할 서류가 너무 많아서 두통이 올 지경인데 엄마는 이름 석자도 제대로 쓸 줄 모르시니 그때마다 엄마를 모시고 은행에 함께 갔다. 돈 천만 원을 대출받으려 해도 은행 직원이 엄마에게 건네는 서류뭉치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가 이름 석 자만 쓰시고 나머지 빈칸은 내가 대신 작성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은행원들은 모든 서류를 본인이 작성해야 한다며 엄마에게 어려운 용어까지도 다 쓰게 했다. 어떤 은행 직원은 엄마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를 보며 다시 쓰시라며 서류를 다시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엄마는 숨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엄마가 정작 손이 떨렸던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빌린 돈에 대해서 엄마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손이 떨려서 글씨도 떨렸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쓰기 힘들고 쓰고 싶지 않은 엄마의 이름 석 자.

하지만 IMF 때부터 지금까지도 엄마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그토록 가기 싫은 은행의 문턱을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밟게 되었다. 엄마의 눈앞에 또다시 대출서류가 한 뭉치씩 놓일 때마다 이름 석 자를 쓰시기를 망설이실 때마다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매우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가난했어도 똑똑한 엄마를 초등학교까지만이라도 가르치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안타까웠다. '엄마가 배움의 기회가 조금 더 많았더라면 지금보다는 조금은 수월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우리 집에서 가방끈이 제일 긴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 내가 공부를 해서 길어진 게 아니라 엄마가 본인의 몸이 부서질 정도로 뒷바라지를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낸 결과여서 엄마에게 늘 감사하고도 죄송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나눠 준 서류에는 부모님의 최종학력을 쓰는 란 밖에 없는 게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아쉬웠다. 물론 학력이 그 사람의 교육 수준을 말해주니 적으라 했을 것이다. 비록 학력은 남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엄마는 생활력, 자녀에 대한 사랑, 부모의 희생, 성실함, 정직함 면에서는 다른 부모님 못지않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충분히 훌륭한 엄마셨다. 세상이 나에게 내미는 잣대의 기준치에는 훨씬 못 미치는 엄마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부모가 갖춰야 할 여러 소양들을 골고루 다 갖추신 훌륭한 분이었다. 나도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을 주셨던 것만큼 내 아이들에게는 못 해줄 것 같다.


엄마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장사를 하시는 사이 우리 8살 난 큰 아이는 어느새 할머니보다 한글을 먼저 떼 버렸다. 어느 날. 내가 볼일이 있어 아이를 엄마 가게에 맡기고 볼일을 보고 왔다.

가게 문 너머로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손주를 위해 주변에서 얻어놓은 동화책을 읽어주시는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노랫가락처럼 가게문 너머로 흘러나온다. 우리 아이처럼 글을 띄엄띄엄 천천히 읽는 엄마이지만 손주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마음은 그 누구 못지않기에 한참 동안 가게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배울 기회가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좀 더 편한 삶을 사셨을 엄마.

이제는 연세가 있으시니 힘든 장사는 그만 내려놓으시고 늦깎이 나이이지만 한글 공부를 하셔서 이 세상을 더 많이 보고 엄마의 이름 석 자를 예전보다는 조금은 수월하게 쓰실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앞으로 엄마가 한글을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