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수퍼

서울에 있는 슈퍼이지만 뼛속까지 시골 구멍가게.

by 지구별소녀

어느 날, 남편이

"장모님 가게 이름이 왜 남양 슈퍼야? 남양이랑 무슨 관련이 있어?"라고 뜬금없이 물었다.

"아니. 전혀. 근데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깜짝 놀랄 걸? "

"왜?"

"음... 엄마가 2005년도에 그 가게를 시작하셨는데 전에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시던 분도 역시 슈퍼를 하셨어. 그래서 어차피 업종도 같고 간판을 바꾸려면 돈이 또 드니까 엄마가 그 이름을 그대로 쓰기 시작한 거야. 그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도 지금 엄마 가게의 전화번호와 달라. 근데 그냥 15년 넘게 남양 슈퍼라고 간판이 붙어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가게 이름을 바꾸면 좀 그러니까 안 바꾸시고 그냥 그 이름을 쓰시는 거야..."

"아..."

친정엄마가 운영하시는 슈퍼의 이름은 그래서 남. 양. 수. 퍼. 가 되었다.

2005년도에 가게를 시작했을 때 간판을 바꿨어야 했는데 바꾸지 못하고 그냥 사용을 했더니 지금 16년째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아마도 남양 슈퍼의 반전(?) 비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의 슈퍼는 서울 도봉구에 위치해 있다.

외관으로 보나 내실로 보나 서울에 있는 슈퍼라기보다는 시골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건물이 정남향이어서 간판은 진작에 햇빛에 빛이 바랬으며, 늘 할머니들로 북적북적대는 평상이며, 심지어 잘 얘기하면 외상도 가능한, 때로는 주변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택배도 대신 맡아주는, 주변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서 부르스타도 빌리러 오는 무슨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이 드는 슈퍼이다.


처음부터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엄마 가게 근처에 대형 학원이 있어서 학원의 쉬는 시간마다 엄마와 내가 둘이서 계산을 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아이들이 몰려와서 장사가 아주 잘 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학원은 낮은 출산율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결국 없어졌고 엄마 가게의 매출도 덩달아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엄마 가게의 주변에는 단독 주택과 빌라 몇 채와 음식점들만 있다. 그래서 엄마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 데 있는 손님들마저 주변에 있는 농협과 편의점으로 옮겨갔다. 맥주 4캔을 단돈 만원에 팔고 있는 편의점으로 젊은 층의 손님들이 옮겨갔고, 국산 농산물과 저렴한 가격에 소주를 팔고 있는 농협이 근처에 가격경쟁력에서 월등히 밀리는 엄마 가게는 운영하면 할수록 적자폭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엄마가 칠순을 바라보시는 나이이기에 엄마에게 장사를 이제 그만하고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혼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는 장사를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으셨고 틈새시장을 찾으려고 노력하셨다. 결국 엄마는 농협과 편의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것을 팔기 시작하셨다.

바로 손품을 파셔서 야채를 다듬고 돈이 없는 손님들에게는 외상도 주는 21세기에는 보기 드문 고객 맞춤형 가게가 되었다.


예를 들어 주변에 있는 식당 사장님께서 파김치를 담그신다고 쪽파를 몇 단 주문하시면 엄마는 하루 종일 평상에 앉아서 쪽파를 손질할 것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듬었다.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 속에 옹벤져스가 있다면 우리 엄마 가게에는 동네 할머님들로 구성된 할벤져스가 계신다. 아침이 되면 비나 눈이 올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할머니들이 오셔서 평상에 앉아 계신다. 동네 마실을 나오신 할머니들에게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달짝지근한 커피믹스 한 잔씩을 대접해 드린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손님들의 주문으로 쪽파나 고구마순, 비름나물을 다듬고 계시면 할머니들도 담소를 나누시며 나물 다듬기를 거들기도 하신다.


그러다가 시장하시거나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할머니들과 엄마는 번갈아가며 밥을 사셨다.

할머니들이 겉절이 김치가 드시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얼른 밥을 안치고 가게에 있는 배추를 숭덩숭덩 썰어서 휘리릭 겉절이를 만들어 내어 왔다. 엄마는 전라도가 고향이라 양념을 많이 하시기에 엄마의 손맛까지 더해지면 아주 맛있는 김치가 탄생한다.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맛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김치는 맛있게 잘 만드시는 편이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 같이 식후 커피 한 잔씩을 호로록 같이 드신다.


얼마 전에 엄마 가게 바로 근처에 젊은 사람들이 가는 커피 전문점이 생겼다. 그러자 할머니들이 커피를 드시는 스타일이 바뀌셨다. 특히나 더운 여름에는 제일 저렴하면서도 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한 잔만 시키셔서 시럽을 듬뿍 넣어서 커피를 가져오신다. 그러고 나서 엄마 가게에 있는 우유를 넣어서 지혜롭게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만들어서 여러 분이 나누어 드신다. 엄마와 할머니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셨고 커피 한 잔을 두 분이나 혹은 세 분이서 아주 맛있게 나눠드셨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아서인지 전라도 순천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셔서인지 조금만 사정을 알고 친해지면 손님들에게 외상을 잘 주시곤 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엄마랑 같이 여기저기 외상값을 받으러 다녔었는데 그때도 외상값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이제는 외상을 그만 주실 법도한데 엄마의 외상장부를 보면 동네에 사시는 개인택시 할아버지, 단발머리 총각, 엄마 가게에 자주 오시는 아주머니 등 외상 장부에 늘 이름이 올라가 있는 분들이 계신다.


심지어 엄마 가게 옆에 있는 빌라에 살고 계신 분은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택배 수령지를 엄마 가게로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고 엄마에게 부르스타를 빌리러 오는 일도 있었고 엄마 가게가 파출소 바로 옆에 있으니 누가 경찰 아저씨의 자동차 바퀴에 오줌을 쌌는지 엄마가 보고도 아는 체를 할 수 없는 어이없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내가 봐도 신기한 구석이 많은 가게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엄마는 얼굴이 간판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한 동네에서 내 나이만큼 40년 넘게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엄마를 모르는 어르신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나도 얼굴이 잘 알려진 엄마 덕분에 할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할머니들이 담그신 김치며 직접 만드신 누룽지며 밑반찬까지 얻어먹은 적이 많다. 혼자서 슈퍼를 16년 가까이하고 계셔서 엄마가 마음 한편이 적적하실까 봐 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엄마 가게에 오셔서 말동무를 해 주시는 할머니들과 정이 많은 단골손님들이 계시고 바로 옆에 경찰서까지 있어서 마음이 놓일 때가 많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평생을 개미같이 일만 해오셨기 때문에 가게를 그만두시면 못 견디실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식들도 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고 연세도 일흔을 바라보고 계시니 고단한 일을 그만 내려놓으시고 엄마의 남은 인생에 좀 더 즐기고 사셨으면 좋겠다.

엄마는 앞으로 1~2년 동안만 장사를 더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말씀은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학교만 졸업하면. 시집만 가면. 엄마 빚만 조금 더 갚으면. 이라면서 계속 정년이 자동 연장되고 있다.( 원래 회사에서는 정년이 연장되면 반길 일이지만 엄마의 정년 연장은 이제 그만되었으면 한다.)


40년 넘게 장사를 하셨는데도 그동안 여러 일들이 있어서 돈을 많이 못 버셨다. 하지만 주변에 마음이 따뜻한 할머님들이 계시고 돈보다는 사람이 남는 장사를 하셨기에 엄마가 자랑스럽다. 엄마 가게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동네의 사랑방처럼 만남의 광장처럼 훈훈하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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