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

내 사랑 순이

by 지구별소녀

엄마는 1955년에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잘 울지 않고 순하다고 해서 외할머니는 엄마를 김순이라고 이름 지었다. 어린 시절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엄마는 김순이가 아닌 김순례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호적에 올라간 이름보다 부르기도 쉽고 더 정감있는 ''순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외할머니는 아이를 7명 낳으셨다.

아들-아들-딸-아들-딸-딸-딸.

엄마는 셋째로 태어났고 딸 중에서는 제일 맏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엄마의 제일 큰 오빠는 3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둘째로 태어난 외삼촌이 결국 외갓집의 장남이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광산일을 하러 나가셔서 일 년에 두. 세 번 정도만 집에 들어오셨다. 그래서 아이들을 기르고 생계를 책임지는 건 늘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집이 워낙 가난해서 하루 한 끼도 겨우 먹었다. 먹을 음식은 늘 부족한데 식구는 많으니 외할머니는 물을 넣으면 양이 많아지는 김치죽과 무청시래기죽을 주로 끓였고 쌀보다 고구마가 더 많은 고구마밥을 만들어 온 가족이 같이 먹었다.

외할머니가 다른 집에 품을 팔러 가는 날이면 겨우 9살이었던 엄마는 밥 한 공기에 김치를 송송 썰고 물을 부어 김치죽을 만들어서 어린 동생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은 보리가 얼까 봐 흙으로 덮어주러 나가셨다. 그 당시 큰 외삼촌은 5살. 엄마는 3살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엄마와 외삼촌이 추울까 봐 논 한쪽에 불을 지펴 주셨다. 하지만 어린 엄마가 계속 추워하자 큰 외삼촌은 가을에 수확하고 남은 볏짚을 모아서 불을 피운 곳에 계속해서 가져다 날랐다. 어린 엄마는 불이 뜨거운 줄도 모른 채 예쁘다며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가 한참 일을 하고 계시는데 어디선가 "엄마, 뜨거워!", "엄마, 뜨거워!"라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엄마가 입고 있던 저고리에 불이 붙어서 뜨겁다며 할머니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할머니는 얼른 불을 껐다. 하지만 엄마의 몸과 얼굴에는 이미 불에 덴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갈 돈이 없었던 외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싼 오줌을 여기저기에서 걷어다가 오줌 속에 엄마의 몸을 푹 담갔다. 하지만 화상을 입은 눈가와 입가와 얼굴에는 차마 오줌이 들어갈까 봐 바르지 못했다.


할머니의 응급처치로 엄마의 몸에는 다행히 화상흉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왼쪽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화상 흉터가 심하게 남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옛날 사진을 보면 늘 왼쪽 앞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앞머리로 화상 자국을 애써 감추시려고 했던 것 같다.


엄마는 화상으로 인해 입이 안 벌어졌고 음식을 전혀 받아먹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가 혹시나 큰아들처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외할머니는 엄마를 따뜻한 아랫목이 아닌 추운 윗목에 눕혔다. 열 흘정도 지나자 엄마는 겨우 입이 벌어졌다. 할머니가 묽게 쑨 암죽을 한 숟가락 떠 먹였더니 엄마는 조금씩 조금씩 받아먹기 시작하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화상을 입게 된 엄마는 혹여 본인의 딸이 화상을 입을까 봐 겁이 나고 걱정이 되었는지 내가 어렸을 때 엄마를 도우려고 부엌에 들어가면 절대 가스레인지 근처에도 못 오게 하셨다.




엄마는 10살이 되었을 때 새 쫓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산비탈에 뿌려놓은 나무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새를 쫓는 나무 도구를 손으로 연신 흔들면서 입으로는 "후여후여"라는 소리를 내며 씨앗을 먹으러 오는 새를 쫓고 하루에 20원의 일당을 받았다. 그리고 비닐하우스에서는 오이넝쿨이 잘 올라갈 수 있게 지지대에 묶어주는 일을 해서 하루에 40원을 벌었다. 그리고 떡을 팔러 나가신 외할머니가 떡이 다 팔려서 떡을 새로 가져다 달라고 인편에 기별이 오면 어린아이가 걸어가기에 다소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떡을 머리에 이고 할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엄마는 일을 나가신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초등학교를 하루 나가고 3일은 못 나가고 또 하루 겨우 나가고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결국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만 다니고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학교도 못 나가고 열심히 어 키우면서 돌보던 바로 밑의 여동생은 결국 큰 오빠처럼 태어난 지 3년 만에 가난과 굶주림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외갓집은 2남 3녀가 되었다.


엄마가 12살이 되던 해에 외갓집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엄마는 자전거에 다는 바구니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에야 일이 끝나는 어른들감당하기에 버겁고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14살 때부터는 양말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2교대로 일을 했다. 저녁 7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한 후 다음날 아침 8시가 되어야 퇴근을 하는 삶이었다. 300원의 월급을 받으면 그 당시 가난한 집의 장남, 장녀들이 그러했듯이 외할머니에게 보내어 생활비에 보탰다.


그 당시에 양말공장에서는 하루 종일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보다 나이가 어린 양말공장 사장님의 딸은 하루 종일 피아노를 쳤다. 엄마는 매일같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서 피아노를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딸은 엄마가 피아노를 만져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피아노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