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옆 동네에 있는 병설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유치원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빨리 걸었을 때 15분. 아이가 주변을 구경하거나 천천히 걷기라도 하면25분에서 30분까지도 걸리는 거리였다. 병설유치원은 학교 안에 있기 때문에 학교와 똑같이 매일 오전 9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친정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는 시간은 대략 8시 30분에서 35분 사이. 엄마가 늦잠을 주무시거나 몸이 아프셔서 우리 집에 늦게 도착하시기라도 하는 날엔 엄마의 몸이 괜찮냐고 묻기보다는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준혁이 늦겠어." 하며 큰아이 손을 잡고 뛰기 바빴던 못난 딸이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에 '나 왜 이렇게 못났지?' 하는 생각이 들며 나 자신이 미워질 때도 많이 있었다.
입학 전.
큰아이의 유치원 대기번호가 20번이어서 거의 입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유치원으로부터 합격 전화를 받게 되었다. 너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둘째가 아직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었기에 '그 먼 거리를 아침마다 유모차에 애 둘을 태워 등원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어느 날.
"정림아, 엄마가 매일 아침 너네 집에 갈 테니까 준혁이 데려다주고 와. 엄마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라고 말씀해 주셨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때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한 동네에서 야채, 과일장사를 하신다. 매일 아침 9시에 가게 문을 열고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문을 닫는 고단한 생활을 하고 계신다. 나와 친정오빠 결혼식 날에만 가게 문을 닫으실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고 억척스러운 엄마.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시느라 몸이 여기저기 아프시고 피곤하실텐데. 매일 아침 우리 집에 와 주신다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 죄송했다. 하지만 결국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지난 2년간 큰 아이는 병설 유치원에 행복하게 잘 다닐 수 있었다.
작년 겨울아침에 엄마가 집에 오셨다. 그런데 엄마의 몸이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허리 통증은 물론이고 다리까지 저시고 몇 걸음 못 걸어가 주저앉아버리셨다. 그동안 잘 버텨주었던 엄마의 몸이 탈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서둘러서 병원 예약을 잡고 허리 MRI를 찍으러 병원으로 갔다.
엄마의 허리디스크는 예상대로 심하게 파열되어 있었다. 연세가 있으셔서인지 척추관도 이미 많이 좁아져 있는 상태였다. 터진 디스크가 신경을 눌러서 다리 부분이 저리고 걸음을 잘 못 걸으시는 것이었다. 엄마의 허리 MRI사진을 보니 평생 자식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본인 몸은 챙길 겨를이 없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매일같이 손주들을 봐주러우리 집에 오시느라 몸이 더 상하신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다.
엄마는
"나이가 드니까 써먹을 만큼 써먹어서 허리도. 다리도 아픈 거겠지.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는 네 허리나 관리 잘해"라고 말씀하셨다. 가뜩이나 버거운 엄마의 삶에 무게를 더 얹어준 딸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엄마를 보며
'내가 엄마의 입장이어도 자식에게 괜찮다고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유치원이 개학을 해도 아이가 다니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친정엄마의 건강도 너무 나빠지셨기에 고민 끝에 결국 유치원을 그만두고 두 아이를 모두 가정 보육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에게는 매일같이 "준혁아, 지은아, 엄마가 사랑해!"라고 말하며 뽀뽀하고 안아주었다. 문득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린 시절. 어버이날에 적은 카드에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은 게 마지막인 것 같다. 엄마에게 사랑을 드리기보다는 받는 게 더 익숙했던 못난 딸이었다. 큰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하며 산통을 겪어보자 '엄마도 날 이렇게 힘들게 낳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결혼 전에 엄마를 많이 알고 있고 이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이를 낳고 회복실에 누워 빈 천장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엄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늘 내게 해주시기만 했던 엄마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엄마들은 다 그런 줄 알았고 그게 엄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당연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가 엄마의 이름을 내려놓고 내 엄마로서만 평생 살아왔듯이 나 또한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엄마로서 지난 8년을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엄마는 엄마로서 많이 힘들지 않았어? 나는 겨우 두 아이를 키우는데도 힘들고 버거워서 때론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었어."
"나는 그런 거 없었어. 내가 낳았으니까 끝까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라고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기억이라는 놈은 참으로 야속해서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흐릿해지고 기억해 내려할수록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더 꼭꼭 숨어버렸다. 아이들이야 앞으로도 사랑해 줄 시간이 충분할 것 같은데.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 속에 저장된 엄마에 관한 추억을 이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내 나이 41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꺼내게 되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더 늦기 전에. 기억이 좀 더 흐려지기 전에. 엄마와의 시간과 좋은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