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14살 때부터 21살 때까지 서울시 오류동에 있는 양말공장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21살 때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 당시 부천에 살고 있었던 아버지는 엄마와의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일같이 부천에서 오류동까지 7 정거장을 걸어 다녔다. 아버지가 매우 가난했지만 엄마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엄마는 아버지와 만나기 시작했다. 6개월 정도를 사귀었고 그 옛날에 많은 커플들이 그러했듯이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못 올리고 같이 살게 되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재혼을 해서 우리 아버지를 낳았다. 친할아버지에게는 이미 전처에게서 낳은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다.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박(朴)씨 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집안에서는 외톨이이자 이방인이었다. 친할아버지의 다른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엄마가 다르다며 인정해주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는 친할머니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친할머니 또한 재혼 전에 낳은 정 씨 성을 가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래서 박 씨 성을 가진 아버지는 정 씨 성을 가진 형과 살았어도 이번에는 아버지가 다르다며 형에게 미움을 받았다.
아버지는 유년시절. 박 씨도 정 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며 외롭게 살았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하고 싶었고 결혼 후 아버지가 처음으로 갖게 된 우리 가족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래서 절대 이 울타리만은 깨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몹시 가난했던 아버지는 결혼 전에 친할머니와 둘이서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아버지와 같이 살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 엄마는 시어머니와 같은 방에 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엄마는 시어머니와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할머니는 엄마를 처음 본 순간. 아버지에게 어디서 얼굴에 흉이 있는 여자를 데리고 왔냐며 마음에 안 든다고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하셨다. 매일 아침. 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여러 가게의 장사꾼들이 친할머니가 져 놓은 외상값을 갚으라며 아버지를 쫓아다녔다. 그래서 엄마는 양말공장에서 받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친할머니의 외상값을 대신 갚기 시작했다. 엄마는 결혼 후 큰 아이를 임신한 지 6개월 만에 드디어 돈을 모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어머니와 산 지 일 년 만에 방 보증금 30,000원과 월세 3,000원을 마련해서 드디어 분가를 하게 되었다.
인천으로 이사를 간 엄마는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오빠를 낳게 되었다. 그러다가 엄마와 아버지가 근무했던 양말공장에서 양말을 짜는 기계를 우선 외상으로 줄 테니 공장을 시작해보라고 권하셔서 오빠가 9개월 때 엄마와 아버지는 인천에서 오류동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는 오빠를 등에 업고 양말공장 직원들에게 점심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양말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길이 막히게 되어 일거리는 점점 없어졌고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사업을 만회해 보기 위해 처음으로 도박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무리 하지 말라고 말려봐도 아버지는 계속 도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도박을 그만두지 않으면 엄마가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말을 했더니 아버지는 갑자기 서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엄마는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엄마는 쓰러져서 일주일 동안이나 못 일어나셨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엄마는 나를 임신하게 되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통증으로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다. 산부인과 병원비를 구해보겠다며 아버지는 아침 9시에 집을 나가셨다. 진통이 더욱 심해진 엄마는 결국 옆집 아주머니에게 병원비를 겨우 빌려서 나를 병원에서 낳았다. 아버지는 나를 낳던 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병원비조차 구하지 못한 채 빈 손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셨다.
나를 출산하고 엄마는 한 달 정도 모유수유를 했다. 하지만 누우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어느 날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이 "혹시 갈비뼈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라고 물으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발로 옆구리를 걷어찼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늑막염이어서 염증을 없애야 해서 약을 드셔야 합니다. 그래서 모유를 아기에게 먹이시면 안 돼요. 아기가 기형이 될 수 있어요..."
엄마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그날부로 젖을 끊어야 했다.
엄마가 통증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나를 데리고 쌍문동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왔다. 외갓집에서 일주일 정도 요양을 하고 다시 오류동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공장 보증금 150만 원과 양말공장에 있었던 20대의 기계는 이미 다 처분되고 없어진 후였다. 엄마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버지는 그렇게 도박으로 결혼 후 5년 동안 모아놓은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허공에 날려버리셨다.
그래서 집 보증금만 겨우 건져서 그 보증금을 빼서 1981년도 11월에 외갓집이 있는 쌍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쌍문동에서 양말공장을 하고 있는 큰 외삼촌의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때부터 외갓집에 나를 맡기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야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외할머니, 큰 외숙모, 이모, 외삼촌의 손에 크게 되었다. 낮에는 외할머니댁에서 생활을 했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엄마는 28살 때 시작했던 장사가 그로부터 40년이 넘게 이어질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쌍문동에서의 생활은 뜻하지 않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