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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MOZ Dec 29. 2022

사라지지 않을 추억

작곰


전주 객사에 영화의 거리가 있다. 씨네 Q 극장을 지나 언더아머 매장을 지나면 검은 바탕에 주황 글씨로 작은곰자리(이하 작곰)라 쓰인 세로 간판이 달린 카페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드러운 조명이 아늑하게 안아준다. 메뉴는 왼쪽 윗벽에 검은 칠판에 흰 글씨로 적혀있다. 익숙한 커피 메뉴 옆에 초콜릿 음료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착한곰, 나쁜곰, 북극곰, 이상한곰, 스마트곰, 얼빠진곰... 이름만 보고는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어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쓰여 있다. 갈 때마다 새로운 곰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착한곰(벨기에 벨코라도 55% 다크초콜릿)

나쁜곰(프랑스 발로나 66% 다크초콜릿)

북극곰(프랑스 발로나 화이트초콜릿+피스타치오+시나몬)

이상한곰(벨기에 벨코라도 화이트초콜릿+녹차)

스마트곰(벨기에 벨코라도 밀크초콜릿+피스타치오+헤이즐넛)

얼빠진곰(벨기에 벨코라도 밀크초콜릿+얼그레이)


 나는 주로 시원한 착한곰을 마셨다. 파랑, 주황, 노랑 곰돌이 세 마리 얼굴이 그려진 유리잔에 초콜릿 음료가 담겼다. 거품이 조금 있고 그 아래 각얼음이 자리해 시원하다. 잔 아래로 갈수록 미지근하다. 그래서 일단 빨대를 깊게 꼽아서 진한 초콜릿 맛을 한 번 느끼고 빨대를 올려 두어 번 젖고 시원하게 빨아 마신다. 착한곰은 일반 초코 라테와 달리 씁쓸하고 바디감이 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밖에 나갈 핑계가 필요할 때 그 맛을 생각하며 짐을 챙겼다. 착한곰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서 카페에서 공부하게 했다. 서부시장 골목에 있는 우리 집에서 작곰까지 걸어가면 40분이 걸린다. 허벅지에서 맥박이 뛰며 조금 걸었다는 신호가 올 때 푹신한 소파에 앉아 시원한 착한곰을 한 모금 하면 짜릿하기까지 하다. 눈이 질끈 감긴다. 행복에 겨워 책 펴고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사장님은 눈치 주지 않으신다. 덕분에 더 편안하게 나만의 아지트로 삼았다.

 대전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전처럼 자주 갈 수 없게 되자 생각보다 작곰이 더 소중하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광역시인데 작곰 같은 카페 하나쯤 있겠지' 하면서 퇴근 후 초콜릿 음료 전문점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작곰의 맛은 없었다. 씁쓸한 맛은 나지만 초콜릿과 우유가 어우러진 찰진 맛이 아니었다. 서로 따로 놀았다. 아쉬운 다크초콜릿 음료를 홀짝이며 머리를 부여잡고 뇌세포를 자극했다. 도대체 뭘까. 눈을 감고 작곰에서 초콜릿 음료 시킬 때를 회상했다. 믹서기 소리가 들렸다. 거품도, 잘 섞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그때부터 나는 작곰 예찬론자가 되었다. 전주에 작은곰자리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대학교에 다니며 작곰을 알게 되었다. 주로 혼자 공부하거나 과제 할 때 갔지만 친구와 약속 잡을 때에도 추천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은 교회 친구와 점심 먹고 가고 고등학교 친구와 저녁 먹고 또 갔다. 작곰은 나에게 카페 그 이상이었다. 초콜릿 음료 먹는다며 지청구하는 엄마도, 미운 정 고운 정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도, 교회에 새로 온 언니도 그곳에서 함께했다. 다채로운 인연이 한겹 한겹 쌓여 페이스트리처럼 부풀어 내 삶을 풍성하게 해줬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인연은 교회에 새로 온 언니와 만남이다. 국수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모여 국수 맛집에 갔다가 돌아와서 둘이 시간이 맞아 따로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 갱년기로 힘들어하는 엄마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을 때였다. 누구에게도 속 이야기를 잘 안 했는데 무슨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따뜻한 음료와 언니 앞에서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작년에 글을 배우겠다며 상경하고 적응하느라 사랑하는 작곰에 못 갔다. 올해 11월 오랜만에 들렸는데 작곰 문이 닫혀 헛걸음했다. 단골의 촉일까? 분위기가 이상해서 혹시 아예 접으시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한 달 만에 다시 가보니 정말로 없어졌다. 그 장소에 다른 음식점이 들어섰다. 하아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장소가 바뀌며 내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듯이 느껴졌다.

 비록 작곰은 없어졌지만 함께했던 추억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았고 사진도 있다. 카페가 없어지고 나니 마음이 아리고 빈 구멍이 생긴 듯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곳을 추천하며 시간을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걸 같이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사실 작곰은 전주에 두 개 있다. 객사에 하나 전북대에 하나. 지금 없어진 게 확인된 매장은 객사뿐이니 다음에는 꼭 전북대에 있는 매장에 들러야겠다. 지금까지는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용기 내서 사장님께 카페를 운영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 겨울 따뜻하고 안락한 카페에서 시원한 착한곰을 마시며 작은곰자리가 아직 건재함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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