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드라마의 간극
매주 목요일 오후 9시가 넘어선 시간이면, TV가 놓인 우리 집 거실에서 늘 이 말이 울려 퍼지곤 했다.
"말도 안 돼!"
우리 부부는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병원도 다르고 과도 다르지만 환자를 보고, 논문을 쓰는 등 주로 하는 일의 범주는 비슷하다. 과학자란 자의식이 강해서 의사 결정에 있어 비판적 회의주의를 주로 사용한다. 다른 말로 좀 까칠하다 뜻이다.
나는 국내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느릿한 전개와 개연성 부족, 그리고 감정 과잉 등이 취향에 맞지 않았다. 특히 의학드라마는 리얼리티의 부재를 크게 체감하는 터라 1회 시청을 넘기기 힘들었다. 작가에 전권이 부여된 제작 환경 때문인지 전문가의 꼼꼼한 자문보다는 지나치게 작가적 상상력만 앞세우는 경향이 많았다. 무늬만 의학드라마이지, 내용은 기존의 다른 드라마와 다를 게 없었다. 최근 K본부에서 정신과 의사를 소재로 드라마를 한다길레 '이제는 좀 달라졌겠지'하며 조심스럽게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청한 지 몇 분 만에 헛헛한 탄식과 함께 분노의 채널 zapping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우와, 말도 안 돼!"
미드 "In Treatment"에 매회 등장인물은 환자와 의사, 단 두 명이다. 실제 심리치료 상황 그대로 두 사람 간의 대화만으로 진행된다. 그 밋밋한 화면 내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일 이래 봐야 가끔 목소리가 높아지는 정도가 전부다. 극적인 장면이랄 게 없다. 하지만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오가는 심리적 긴장감은 대단하다. "이게 왜 재미있지?" 하면서도 다음 치료 회기를 계속 보고 있다. 바로 리얼리티의 힘이다.
이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시니컬한 우리 두 부부가 전편을 즐겁게 완주했다. 치료진이 구사하는 의학용어들은 역대 가장 현실감이 있었고, 다양한 시각에서 묘사된 각 환자들의 에피소드들은 잘 짜여져 있었다. 디테일을 살린 의국의 풍경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매력이 있었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 부부가 함께 손꼽은 최고의 연기는 환자와 보호자들이었다. 연기한 분들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짧기에 더 간절한 연기들을 보면서, 기억 속 환자와 보호자들이 그대로 눈앞에 소환된 느낌이었다. 7화에 투약을 거부하던 우울한 간이식 환자는 며칠 전에 본 환자 같아 감탄했다. 간호 파트의 고단함도 놓치지 않고 잘 조명했고, 노년의 우정까지 폭넓은 이슈들을 세심하게 다루어 좋았다. 이렇게 ‘말이 돼’는 것뿐이었다면 '말도 안 돼!'가 거실을 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주변부의 디테일은 모두 좋았으나, 정작 5인의 주인공들은 지구를 구하는 독수리 5형제 같은, 마블 히어로의 어벤저스 같은 판타지 속 인물들로 만들어 놓았다. 어떤 소망이 투영된 캐릭터이겠으나, 현존할 확률이 너무 떨어진다. '병원을 지키는 평범한 의사들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다'라는 기획의도가 무색하다. 먹는 것을 밝히고 격의 없는 모습만 보인다고 평범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인간성, 유머, 실력, 노래, 외모를 갖춘 이익준 교수가 수화까지 구사하는 장면은, 아이언맨에게 토르 망치를 쥐어주는 느낌이었다. 안정원 교수는 환아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전형적인 아마추어 의사의 심리이다) 치료 경과에 따라 기분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워낙 정이 많은 성격에 주로 아이들을 보는 소아외과의 특수성 때문이라며 이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말미에 수술 후 환자를 돌보면서 나흘간 하루 종일 중환자실에 붙어 있는 그의 모습을 인간적이고 헌신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좋은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과연 좋은 의사일까? 의사에게 최선은 最善보다는 最選에 가깝다.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매 순간 전력을 다한다는 게 아니라, 매 순간 환자에게 필요한 최적(最適)의 선택(選擇)을 한다는 뜻이다. 나흘 밤낮을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교수가 다음날 외래 진료와 이어지는 수술에서 과연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는 환자를 위해서도 아니요,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도 아니요, 단지 본인 불안을 달래기 위한 미숙한 행동일 뿐이다. 효율적으로 치료 인력을 활용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으로 치료팀을 지휘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수술도 잘하기 어렵다. 감동적인 음악과 함께 눈에서 하트 뿅뿅하는 보호자들을 비출 게 아니라, 같은 외과의 이익준 교수가 '가서 밥도 먹고, 눈도 좀 붙이라'며 조언했어야 하지 않을까?
'비정상 회담'에 출연했던 마크 디토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가장 크게 느낀 문화 차이에 대해 말했다.
"미국에서는 싱글이 기본값(Default Mode)이라 생각하는데 반해, 한국사람들은 커플이 기본이고 연애를 안 하고 있으면 비정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슬의생"의 연애 도식은 이런 전형성을 그대로 따른다. 더 이상 가능한 러브라인이 있을까 싶을 때, 마지막 남녀 전공의(신경외과 용석민과 허선빈)들 마저 끝내 연결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건 그나마 현실적이다. 메인 스토리에 해당하는 전공의와 교수들 간에 러브라인은 투머치였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으나, 우리 부부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다. 타과라면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같은 과에서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기본적으로 상하 관계인 동시에 사제지간에 가깝다. 교수와 지도 학생 간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사회적 시선이 따가운 게 현실이다. 이 관계 속에 들어간 사람이 어쩌다 한 명도 아니요, 주인공 5명 중에 3명이다! 최종회 마지막 장면도 불편했다. 전공의 장겨울은 "교수님이 좋아요. 멀리 가지 마세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의 고백을 한다. 이때, 안정원 교수는 느닷없이 키스로 화답했다. 그것도 단둘이 있는 교수실에서. 고백은 키스의 ‘동의’가 아니다. 물론 극 중 마지막 임팩트가 필요했고, 꾹꾹 눌러왔던 연정의 표현이라 하겠으나, 2020년 현재 이런 동의 없는 스킨십이 이해할 만할까? 우리 부부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마지막 '말도 안 돼!'였다.
우리 부부는 모두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쓰다 보니 길어진 이런 글을 쓰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다. (또 생각났다. 저 5인방들은 어떻게 저렇게 시간이 많나? 밴드 연습하고, 툭하면 5명이 다 같이 밥 먹고. 대학병원에 있는 분들은 공감하리라. 현실 속 교수 둘이 모여 점심 먹기도 쉽지 않다.) 어쩌다 보니 틀린 그림 찾기를 하게 됐지만, 시즌 2를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는 없다. 드라마란 판타지일 뿐이다. 그래도, 조금 더 평범한 인물들과 조금 더 현실적인 관계들로 더 실감 나는 시즌 2를 기대해 본다.
소설가 김훈은 '우리 사회는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없다'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글 잘 쓰고 이런 건 필요 없고,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드라마가 전하는 하나의 주제는 인간에 대한 예의, 결국 친절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이것 만으로도 세상의 많은 아픔은 줄어들 거라 확신한다. 이번에 반성도 많이 했다. 좀 더 친절해져야겠다. 환자에게, 아내에게, 나 스스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