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로 May 11. 2021

비대면 사랑은 없다.

무선 전성시대 & 한강 사망 의대생 아버지의 인터뷰

어느 쪽이 더 멋진가요?

선이 사라지고 있다.


전화기 같은 통신장비를 말하는 건 새삼스럽다. 다리미, 청소기, 키보드, 마우스까지 생활도구의 무선화(無線化)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늘어만 가던 복잡한 전선들이 점점 우리 삶을 어지럽힐 거란 걱정은 기우였다.


그래도 이어폰만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크기의 한계도 있을 뿐더러, 음질을 담보로 무선화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기기마다 페어링을 거쳐야 하는 연결 방법은 꽤나 번잡하다. 연결 상태는 불안정하고, 분실의 위험(내 평생 서울의 대중교통 수단에 기증한 우산 숫자만 기백일 터)도 있으니,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이다.


극렬 순음주의자인 나는 좋아하는 음악이나 연주는 반드시 음반으로 구매한다. 어설피 소리만 들을 바엔, 아예 듣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뭉툭한 담배꽁초 같은 걸 어찌 귀에 꽂고 다니냐며 질색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이어폰의 긴 선이 휘날려야만, 음악에 심취한 낭만적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엔 담배꽁초보다 더 짧은 코드레스 이어폰이 꽂혀 있다. 분하고 원통하나, 일상의 편리함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노이즈 캔슬링까지 되는 그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단 한 번에 평생 기증해온 우산과 맞먹는 손실이 될 것이다.


바야흐로 비대면 시대다. 모든 소통은 원격이 우선이고, 만나도 손도 잡기 어려운 무선 전성시대이다. 각종 선들이 사라지면서 몰래 줄을 꼬아 놓던 요정도 우리 곁을 떠나갈 듯하다.


기술의 진보에 무작정 반감을 표하는 복고주의를 표방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찌할 줄 모르고, 선과 줄이 복잡하게 얽힌 삶을 내다보게 된다.


선과 줄에 대한 우리의 가장 오랜 기억은 엄마 뱃속이다. 태아에게 탯줄은 엄마와 연결된 생명줄이자, 한편으론 장난감이기도 했다. 뱃속에서 이 기억 때문에 이후 실뜨기나, 고무줄놀이, 줄다라기와 같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놀이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배꼽은 복제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연(緣)의 흔적이다.


병원에서는 삶이 위태로울수록 몸에 달린 선이 자꾸만 늘어간다. 정맥 라인, L 튜브, 센트럴 라인, 호흡 튜브, 산소포화도나, 혈압계 모니터링을 위한 온갖 전선들이 환자에겐 생명줄이다.


신디사이저나 전자키보드에는 줄이 없다. 아직 디지털의 음색이 STEINWAY(피아노의 명가)를 넘어서진 못하는 듯 하나, 곧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어쿠스틱이든 일렉이든, 기타나 바이올린처럼 아직 줄이 남아있는 현악기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마저 쉽지 않다. 뇌는 뉴런이라는 전기선이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선’ 신경망이다. 뇌과학의 최신 지견에 따르면, 정신질환은 한마디로 ‘뇌의 연결성이 망가진 상태’라 요약할 수 있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눈에 보이는 뇌의 기질적 손상을 유발되지는 않는다. 불안의 중추와 이를 조절하는 고위 중추의 연결의 결함이 핵심이다. 특히 조현병과 같이 ‘정신의 현을 잘 조율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탯줄을 끊음으로써 독립된 개체로 삶을 시작했다. 선이 사라지는 시대, 또 다른 독립을 준비할 시기다. 최신 무선기기에는 멀티페어링 기능이 탑재되었다. SNS의 네트워크와 메타버스의 가상현실로 비대면 연결이 확장되고 있다. 선은 사라지지만, 연은 늘어만 간다. 무선다중연결(無線多重連結)시대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관계의 가벼움’이 넘실거린다.


모든 무선기기는 저 혼자 마냥 작동할 수 없다. 반드시 충전을 해야 한다. 충전은 유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선 충전이라도 충전기는 콘센트에 ‘유선’ 연결되어 있으니까.


무선 이어폰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이어폰을 충전기함에 넣고 ‘딱’하고 뚜껑을 닫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마치 엄마 품에 돌려보낸 아이처럼. 자궁 속으로 들어간 태아처럼. (다소 기괴하게 들리겠지만, 이어폰은 정말 발생 초기 태아를 닮았다.)


존 레넌의 노래 ‘LOVE’의 가사는 단순해서 더 강렬하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사랑은 어루만지는 것이다. 랜선으로는, 무선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며칠 전, 한강에서 사망한 의대생의 아버지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아들을 추억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촉감이에요. 어릴 적 아들을 업었을 때, 아들의 뺨을 비볐을 때, 아들을 안았을 때에요.”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화제 중 하나는 이별이다.

상실의 고통을 위로하고, 새로운 출발을 격려한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어깨 한번 토닥일 수 없는 코로나 시대의 ‘무선’ 진료가 야속하다.

삶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끊고 잇는 선의 연속이다.

다시 사랑하려면,

만나고, 만지고, 살을 부벼야 한다.

비대면 사랑이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급만 늘리면 해결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