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순영 Nov 24. 2023

비 때문에 벌어진 일

시칠리아 여행기


모든 것은 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구사에 있는 3일 내내 비예보가 있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려 했던 모디카는 시라쿠사에 있는 동안 다녀왔고 비 오는 3일 내내 라구사에만 갇혀 있는 게 싫어서 찾아낸 곳이 칼타지로네였다.

칼타지로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세라믹도자기 마을이다.

이곳에 142개의 계단이 모두 다른 모양의 세라믹타일로 장식된 ‘산타 마리아 델 몬테의 계단’이 있다.

론니플레닛에 이 계단의 사진이 아주 근사하게 나와 있어 찍어 두었던 곳인데 루트에 벗어나있기도 하고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려워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구사에서 가는 기차가 새벽에 한 대 있는 것을 알아냈다.

실은 기차를 타고 가다 버스로 갈아타야 했지만 교통편이 있어서 덜컥 예매를 해버렸다.

그리하여 오늘 새벽 5시에 숙소에서 나와 25분을 걸어

기차역으로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내리는 새벽은 추웠다.

한 달 내내 짐만 되었던 옷들을 드디어 꺼내 입기 시작했다.

기차역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역무원도 없고 전광판도 없었다.

표를 예약한 앱만 믿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탈리아 남자 한 명이 역으로 들어왔다.

동지가 생기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기차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앱에는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기다리면 오긴 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낭패였다.

그때 역에 있던 이탈리아 남자가 내 행선지를 묻더니 자기 차로 젤라까지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젤라 라고 하면 내가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해야 하는 곳이었다.

바로 출발하면 버스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놀랍고 고마운 제안이라니.

그렇게 해서 비 오는 새벽 나는 기차대신 이탈리아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젤라까지 가게 되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페데리코, 젤라에 있는 직장을 매일 기차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자차보다 기차가 훨씬 저렴하단다.

차는 역 앞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서툰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젤라까지 같이 왔다.

7시에 페데리코는 나를 젤라의 버스정류장에 내려 주고 일터로 갔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시간도 갖지 못했다. 버스는 7시 5분에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몇 대의 버스가 왔지만 칼타지로네로 가는 버스는 아니었다.

운 좋게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돌아가는 기차는 제시간에 올까? 그때까지 여기서 뭘 하지? 만약에 기차가 안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등등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한 시간쯤 동동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목적지를

묻더니 자기도 거기 간다고 하는 게 아닌가?

또 동지가 생겼다. 갑자기 걱정이 사라졌다.

과연 구글에도 안 뜨는 버스가 왔다.

나는 기사에게 왕복버스표를 구매한 후 버스에 올랐다.

다시 젤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 기차가 없으면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나가 라구사행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수원에서 대전을 가기 위해 서울의 큰 터미널까지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칼타지로네까지 가는 길의 풍경은 이제껏 본 것과 사뭇 달랐다.

도시가 섬의 안 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버스는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 비가 그쳤다.

계단이 있는 중심부까지 30분을 걸어 올라갔다.

멀리서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계단 위에 섰다.

시칠리아에 와서 처음으로 사진을 부탁했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끝내줬다.

구름 가득한 하늘은 드라마틱한 장관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순간이 시칠리아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사람이 내게 베픈 선의의 결과였다.

페데리코가 아니었다면 그 새벽 추위에 떨다 결국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을게 틀림없다.

비는 오락가락했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버스를 타고 젤라로 돌아온 다음 돌아오는 기차는 제시간에 와서 무사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해서 저녁 5시에 도착했다.


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림을 그리지 못해 밤의 라구사골목을 걸으며 궁리를 했다.

오늘의 추억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그림 대신 나는 또 잡지를 꺼냈고 세라믹타일로 장식된 계단을 떠올리며 모자이크 방식으로 종이를 오려 붙였다.

유독 타일 장식이 많아 아름다웠던 칼타지로네집들의 이미지를 약간 살리고 아래쪽에 마주 보는 두 마리 말 이미지로 페데리코의 따듯한 배려를 받고 있는 나를 표현했다.

나는 이렇게 받은 선의를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렇게 선의가 또 다른 선의를 부른다는 의미로 두 마리의 새를 넣었다.

그러니까 이건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콜라주다.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또 이렇게 남긴다.



작가의 이전글 바닷마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