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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Dec 02. 2023

길고 긴 하루 - 팔레르모 가기

시칠리아 여행기


나에게 오늘의 목표는 간단했다.

나폴리를 떠나 기차를 타고 10시간을 달려

팔레르모에 도착하는 것.

야간 기차가 아닌 주간 기차를 선택한 것은 가는 길의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폴리를 갈 때는 비행기로 가서 길의 풍경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점으로 찍히는 여행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점과 점 사이가 선으로 촘촘히 이어지는 여행을 좋아한다.

다음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도 중요하다.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행기 이동보다는 기차나 버스 이동을, 야간이동보다는 주간이동을 선호한다.

애초의 계획은 튀니지에서 배를 타고 시칠리아에 가는 거였는데 중간에 몰타여행이란 변수가 생겼다.

배가 매일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려 비행기로 몰타에 갔고 같은 이유로 비행기로 시칠리아에 왔다.

이탈리아 남부여행도 계획에 없던 거라 한 번은 비행기를 이용했지만 돌아올 때는 필히 기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나폴리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 기대가 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좋았겠지만 가끔 여행은 엄청 꼬이기도 한다.

하필 오늘이 그날일 줄이야.


나폴리에서 부분 철도파업이 있는 날이었던 모양이다.돌아가는 모양새가 그래 보였다.

중앙역에 시위대가 모여 있고 경찰들이 깔려 있는 걸 봤을 때 설마 했다.

9시 50분 기차를 타기 위해 9시쯤 역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고 천천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침을 먹고 전광판을 확인하는데 연착 표시가 떴다.

처음에는 한 시간, 한 시간 후에는 두 시간, 그렇게 연착시간이 늘어나더니 3시간 만에 기차가 출발했다.

오늘 하루는 기차를 타는 것 외에 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음악도 듣고 창 밖 풍경을 보다 어두워지면 유튜브도 보면서 쉬면 되겠다 생각했다.

기차는 나폴리에서 시칠리아까지는 배로 이동한다.

사실 기차를 타고 싶었던 것에는 이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기차가 배까지 연결된 선로로 들어가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다시 육로로 이동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싶었다.

메시나까지 잘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통 메시나에서기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눈치껏 따라 내리며 물어보니 팔레르모는 다른 기차를 타야 한단다.

내려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 주변에서 눈치껏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기차에서 내렸던 사람들이 다시 기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처음 타고 온 기차가 그대로 가기로 했단다.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다시 내렸다. 나도 따라 내렸다.

사람들이 반대편 선로의 기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따라 올라탔다.

사람들이 다시 내리더니 뒷칸으로 옮겨 탔다.

나는 계속 팔레르모? 만 외치며 따라다녔다.

2시간 반 만에 겨우 팔레르모 가는 기차가 정해졌다.

기차가 다시 움직일 때 웃음이 나왔다.

가긴 가는구나 싶었다. 그러면 된 거니까.

이 모든 사태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의외로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역무원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불평을 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일 듯 덤비는 사람은 없었다.

역무원 잘못이 아니니까.

물론 사람들 표정에는 답답함과 짜증이 가득했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건 이런 일들이 자주 있어서일까 궁금했다.


팔레르모에는 하루를 넘겨 밤 12시 반에 도착했다. 오로지 역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얻은 팔레르모 숙소는 그 역할을 다했다.

역에서 걸어서 12분. 숙소까지 직진.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대로변에 위치한 낡고 어설픈 호스텔을 가는 도중 기적처럼 문 연 가게를 발견하고 라면과 맥주를 샀다.

숙소 도착하자마자 체크인하고 라면 끓여 맥주랑 먹었다.

맥주가 설탕처럼 달았다.

하루동안 먹은 거라고는 빵과 과자 아란치니가 전부였다.

배고픈 줄 몰랐다가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었다.

거칠게 생긴 이태리 남자 4명이 엄청 친절하게 나를 맞았는데 새벽까지 담배피며 카드놀이 중이다.

자고 있는 사람들 분명 시끄러울 텐데.

그러니까 이 숙소의 분위기가 이렇다.

처음에는 싫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나름 정답다고 해야 할까?

팔레르모는 리틀 나폴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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