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중간에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다.
유럽은 특히 더 그렇다.
도시의 분위기가 비슷하고 성당은 그게 그것 같아서 나중에는 아예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멋진 건물을 봐도 감흥이 떨어지고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도 시큰둥해진다.
괜히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다 내가 뭐 하고 있나 하는 현타가 오기도 한다.
매 순간 모든 장소가 다 아름답고 기가 막히게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시칠리아를 제법 길게 여행하다 보니 겹치는 풍경이 많아 팔레르모에서 트라파니로 넘어갈 때 즈음에는 일종의 숙제를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보고는 가야겠지 하는 마음이랄까?
트라파니는 큰 기대가 없었고 해발 700미터 위에 지어진 도시 에리체에 대한 기대만 있었다.
그런데 팔레르모에서 트라파니 가는 길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12월인데도 완만한 능선에는 초록빛이 선명했다.
조각천을 이어 붙인 듯한 밭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지나갔다.
바다와 구릉과 산과 이따금 보이는 마을의 모습이 남쪽과는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트라파니에 도착해 짐을 풀고 천공의 성이라고 불리는 에리체까지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갔다.
지나온 풍경이 저 멀리 펼쳐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게 아름답고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산 위의 작은 도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난 여행이 벌써 까마득하게 옛날 같이 느껴졌다.
내가 과연 매일 30도가 넘는 여름을 지나왔는지 사막의 퇴약볕 아래 서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비 오고 바람 불어 춥던 나폴리항에 있었는지 지나온 모든 길이 벌써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에리체는 시간도 공간도 멈춰있는 도시 같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의 삶과 시간의 속도와 공간의 변화가 적은 이곳에서의 삶이 어쩌면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젊음이 머물기에는 너무 지루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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