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에 빠진 여자
드로잉은 좀 하겠는데 색칠만 하면 엉망이 된다.
그러면 색칠은 안 하면 되는데 그게 또 색을 칠하고 싶다.
그나마 잘하는 것을 계속 밀고 나가느냐 아니면 못하는 것도 꾸준히 시도를 해보느냐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다 해보게 된다.
어느 날 스케치를 잘해 놓고 색을 칠하다가 망쳐버려 결국 옆에 있는 남편에게 불평을 했다.
“난 정말 그림에 재능이 없나 봐.”
“재능으로 그리지 말고 재미로 그려.”
“아!!!.”
남편은 가끔 내게 꼭 필요한 대답을 해준다.
재미있어서 시작한 건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보여주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내가 즐거우면 되는 거다.
일단은 딱 여기까지만..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거나 색칠이 엉망이 되거나 하면 기운이 빠지기는 한다.
똥 손도 동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 다니게 된 화실에서 4개월 만에 드디어 수채화 수업에 들어갔다.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첫 그림으로 베네치아 풍경을 스케치하고 하늘부터 칠하는데 그만 망쳐버렸다.
젖은 종이에 물감이 곱게 번지게 색을 칠해야 하는데 물 조절에 실패해서 하늘에 물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몇 번 연습을 하고 했는데도 그렇다.
첫 그림인데 연습한다 생각하지 뭐, 라는 마음이다.
아주 오래전 나였으면 처음부터 화실을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까.
못 그리니까 다니는 건데 못 그려서 다닐 수가 없다 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실패의 과정이 견디기 어려워서 혹은 못해서 쩔쩔매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아예 시작을 안 하면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재능이 없고 내 관심분야가 아니라고 옆에 치워두웠을 뿐이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푹 절어 살던 아주 오래전 나의 모습이다.
지금의 나는 기고만장? 한 자존감의 화신이 된 듯하다.
집에서 수채화 번지기 기법을 연습하려고 그린 두 개의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는 배경이 너무 지저분하게 되었고 하나는 얼굴과 머리의 경계 부분을 망쳤다.
두 그림 모두 버릴까? 고민하다 다르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나는 두 그림 속 여자를 오려 낸 후 머리 부분을 잘라 서로 바꿔주었다.
맘에 안 드는 부분은 다르게 배치했다.
나쁘지 않았다.
완성된 결과물을 바라보다 새롭게 탄생한 두 여인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왼쪽의 여인은 달의 여신 루미, 오른쪽 여인은 태양의 여신 타민.
달의 여신은 태양의 일부를 태양의 여신은 달의 일부를 갖고 있다.
우리 인간이 두 마음을 가지고 있듯이.
두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고 성찰하고 갈등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지고 온전해질 수 있다.
저 두 여신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나는 뭔가 엄청나게 심오한 것을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실패에 대처하는 법,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기.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다.
아무렴 어때?
재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