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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Jan 13. 2024

등을 대주던 남자

상처 입은 영혼과 동행하기


동생하고 하는 여행에서 내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동생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많이 고민하고 한 장소에 오래 머문다.

내가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놓치는 부분을 찾아내고 굉장히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나도 무척 천천히 들여다보는 사람에 속하지만 동생에게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내가 천천히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다 뒤돌아보면 동생은 저만치에서 다른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기 일쑤다.

잘못해서 동생을 놓칠 수 있어 나는 수시로 뒤를 돌아다봐야 한다.

예전에 같이 여행을 다닐 때는 내가 욕심을 부렸었다.

이왕 나왔는데 이것도 저것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만 가자, 이제 충분히 본 것 같다, 얼른 와라, 빨리 따라와라, 와 같은 말을 수시로 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의 평정심이 깨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내 상태는 그대로 동생에게 투사되어 서로 힘들어지는 상태가 생긴다.

투어를 신청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움직일 때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동생을 따라오게 하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여행 중 몇 번이나 동생과 나는 힘든 감정의 고비를 넘긴다.

이번 여행은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동생이 충분히 보고 느끼고 아쉽지만 스스로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몇 번이나 다음 장소로 가도 되냐고 확인하고 더 보고 싶은 게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한다.

우리는 3일에 걸쳐 방콕의 왕궁과 왓포와 왓 아룬을 봤다.

가까이 있어 하루면 다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지만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치앙마이 밤기차를 타야 하는 날, 동생은 왓아룬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곳은 10년 전에 왔을 때는 탑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동생은 계단공포증이 있음에도 기어서 올라갔었는데 내려올 때가 문제였다.

나는 이미 내려와 있는 상태에서 동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너무 무서워하니까 서양남자 한 명이 동생 앞에 서서 등으로 동생을 막아주며 걱정 말고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동생이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올 때마다 그 남자는 먼저 한 계단을 내려가 등을 대주며 기다려줬다.

마지막 계단까지 등으로 동생을 막아준 그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사라졌다.

부끄럽게도 나는 동생에게 그렇게 해줘야 한다는 걸 몰랐다. 이번에는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여전히 그 기억을 하고 있는 동생은 지금은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계단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며 오래 올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키며.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 기억 속에 어떤 다른 기억이 포개질지 모르겠다.

끝까지 아쉬워하는 동생을 다른 장소로 이끌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나를 따라왔다.

나는 지금도 등을 대주던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컥한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등을 대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누군가를 멀리서 찾지 않기로 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부터 돌보는 것이 순리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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