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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Jul 17. 2020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여행이야기-러시아

모든 것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느낄 때 마음 한 구석에선 뭔가 알지 못할 불안감이 느껴졌던 적이 혹시 있었는지?


알마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넘어와서 지내는 내내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다.
백야의 상트는 온갖 매력으로 넘쳐났고 사람들이 넘치는 와중에도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볼거리는 넘쳐 났고 백야의 별이라 불리는 붉은 돛 축제까지 봤으니 더 바랄 것도 없이 풍요로워진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모스크바로 가면 되었다.
상트에서 마지막 밤, 짐을 싸면서 문득 노곤하게 풀어진 마음에 반짝하고 빨간불이 켜졌다.
모스크바는 상트와 달리 지하철 노선도 복잡하고 분위기도 다르다는 말에 슬며시 긴장이 되었다.


고속 열차 삽산을 타고 모스크바 기차역에 내렸다.

역시나 지하철 출입구를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친절한 현지인 도움으로 겨우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참고로 러시아 지하철은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숙소를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숙소를 찾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예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내 여권에 출입국 카드가 없었건 것.


러시아는 입국 카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출국 카드가 반드시 필요한데 보통은 공항 직원이 써서 여권에 끼워 준다.

얇은 갱지에 직원이 알 수 없는 러시아어로 작성해서 여권 뒤에 끼워주는데 어떤 사람은 이게 뭔지 몰라 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나는 알마티에서 들어와서 출국 카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상트 숙소에 체크인할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출국 카드가 없다는 사실조차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게 없으면 출국 당일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
다시 발급받으려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고 벌금도 35000 정도 물어야 한다.

난감했지만 다행히 모스크바 공항에 있는 출입국사무소에서 재발급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다년간의 배낭여행 경험 상 이럴 때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다음 날 치마를 입고 나름 한껏 꾸민 후 공항으로 향했다.
어렵게 지하철 환승을 하고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해 놓은 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공항까지는 잘 왔다.
사실 여기까지도 아주 쉽지는 않았지만 그다음부터는 ‘공항에서 출입국사무소를 찾아보세요.’란 미션에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느 구석에 있는지 몇 사람을 붙들고 질문을 했는지 모른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러시아 사전으로 출입국사무소 란 단어를 찾아 보여 주며 러시아어로 대답해 주는 것을 온갖 눈치로 때려잡은 후 드디어 관계자를 만나 조그만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상황을 설명할 차례.
미리 찾아온 러시아 단어를 순서대로 보여주었다.

출입국카드
직원
실수
받지 못하다
다시
발급


내 실수가 아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으나 운에 맡겨야 했다.
관계자는 느릿느릿 내 여권을 가져가서 뭔가 검색을 하더니 번역가를 돌려 질문을 쏟아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거였다.


왜 이 카드가 필요하지?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 한국에 돌아가야만 해.


그다음부터는 숱하게 들어온 질문들의 나열이었다.

왜 혼자 다니냐? 남편은 어디에 있냐? 얼마나 여행하냐, 직업이 뭐냐 등등.

나 지금 취조당하고 있는 거 맞지?

라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답해주었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나는 절대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직원들끼리의 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두 손을 공손히 가슴에 모으고 슈렉의 고양이 눈을 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긴 대화가 끝나고 직원 한 명이 사유서를 쓰게 한 후 출입국카드를 써서 건네주었다.

사유서에 ‘알마티 공항 직원 실수’라고 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는 끝났다고 가란다.

진짜?

그냥... 가도 돼?

음... 너희들 뭔가 잊은 거 없니?

이를테면 벌금 같은 거라든가?


라고 물어보려다 냉큼 나와버렸다.
아무래도 나의 읍소 전략이 먹혔나 보다 생각하면서. 아니면 미인계랄까...


사실 속으로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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