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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May 04. 2022

닭, 어디까지 그려봤니?

드로잉에 빠진 여자

사람은 누구나 틀에 박힌 모습과 틀을 벗어난 모습이 존재한다,라고 쓰고 ,라고 읽는다.

나는 대체로 얌전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지만 규칙을 깨고 내가 가진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깨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다.

일상에서 일탈은 사소할 뿐이고 여행자가 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다른 나 역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객기를 부리기에는 선을 넘은 일탈의 결과를 너무  아는 나이가 되어 버리기도 했고 일탈을 위한 일탈은 재미가 기도 해서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탈은 뭔가 근원적인  , 보다 내밀하고 보다 깊은 , 숨어 있는 아가 드러나는 ,

자신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마음이 간질거리며 희열이 느껴지는 것 등과 관련이 있다.

 마디로 삶이 재미있어지는 .


그림을 그린다, 라기보다는 드로잉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다.

글도 그렇지만 그림을 보면 내가 보인다.

 하나를 그려도  사람이 드러나는 법인데 나의 그림은 대체로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건물은 반듯해야 하고 나무는 나무같아야 하고 사람은 닮아야 하고 색은 대상을 감싸고 있는  안에 얌전히 담겨야 하고

나는 이런 나를 무척 답답해한다.


좀 틀을 깨봐.

다르게 해 봐.

틀리면 어때? 마음 가는 대로 막 그려봐.


 같은 사람은 마음 가는 대로,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틀을 과감히 깨뜨리는, 등등의 서술어에 무척 약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익숙한 것으로  돌아간다.

안정적이고 안전하고 편안한 영역으로.


나는 펜이나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편하다.

안심이 된다고 할까?

차곡차곡 시간을 들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이면 좋다.

그런 그림은 대충 그럴싸하게 보이게 그려진다.

반면 수채화가 가장 어렵다.

물은 물감을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고 색은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번지고 투명함이 사라진 자리에 탁하고 흐리멍덩한 색의 그림자만 남는다.

사실 수채화가  매우 어려운 장르이긴 지만 특히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예쁘지만 영 나답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이 안 그려질 때가 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수시로  길을 잃은  같은 기분이 든다.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린 것은 마음에 안 들고 스스로의 능력에 실망하고 좌절하게 되는 순간.

그럴 때 필요한 게 좌표다.

등대일 수도 있고.

뭐가 되었든  자리를 다시 확인할  있는 무엇이 있으면 잠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올  있다.

그림에서 내게 그런 좌표가 되는 대상이 바로 ‘닭’이다.

어쩌다 이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림이  그려질 ,  그려야 할지 모를 , 자신의 능력에 실망하고 풀이 죽을 , 닭을 그린다.

연필로 펜으로 슬렁슬렁   마리를 그리다 보면,

그래, 재밌어서 시작했잖아. 재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재미로 그리면 되는 거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좋은 그림, 내게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시작했잖아.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뭘 걱정해.

자, 이제 다시 즐겨볼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시작했다.

닭 100마리 그리기 셀프 도전.

처음에는 안전하게 연필로 살살.

연필로, 펜으로, 색연필로, 오일파스텔로, 잉크, 수채화, 종이, 목탄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료를 이용해서 닭을 그려보기로 했다.


오늘 드로잉북 한 권이 닭으로 채워졌다.

닭 100마리가 되려면 좀 더 그려야 하지만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연필과 펜, 색연필로 그린 닭은 보이는 나의 모습을 닮았다.

수채화로 그린 닭은 자신 없는 내 모습을 닮았다.

그리고 종이로 만든 닭은 틀을 깨고 싶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종이로 만든 닭을 나는 가장 아낀다.

종이로 닭을 그릴 때 가장 즐겁고 희열을 느낀다.

거의 마지막에 목탄이란 재료를 사용하면서 나는 드디어 조금 더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다.

즐거움의 영역이 좀 더 넓어진 느낌이다.

두 달 동안 매일 닭을 생각하며 즐거웠다.


그중 일부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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