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치매가 온 어머님과 7년을 같이 살면서 시아버님은 내내 미움과 울화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내셨다.
시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모시고 난 후에야 아버님도 어머님도 온전한 휴식을 찾을 수 있었다.
대신 미워할 대상도 남지 않은 아버님은 빈껍데기처럼 쪼그라져 버렸다.
삶의 생기라고는 한 줌이나 남았을까?
그래도 그럭저럭 혼자 사는 생활에 적응해 가시고 있다.
늘 같은 국을 한 두 가지 끓여 놓고 한 두 가지 반찬을 더해 식사를 하신다.
드실 만큼만 하고 남을 것 같은 음식은 처음부터 사질 않는다.
냉장고에는 두부나 계란 같은 재료 몇 가지만 들어 있을 뿐이다.
간소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몇 가지만 해 드시니 먹는 게 부실하다. 먹는다는 일에 큰 의미를 두시는 것 같지도 않다.
한 달에 한 번 아버님의 기력을 돋울 음식을 장만해 간다. 지금 나의 최선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살금살금 물건을 치운다.
거실에 늘어놓은 물건은 이케아 트롤리에 담아 정리해 드리고 구석에 있던 빈 박스를 버리고 들통이며 김치통의 제자리를 찾아주면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쌓이지 않는다.
마당에 굴러다니는 깨진 플라스틱 바가지도 버리고 창고 구석에 박혀 있는 절대 쓰지 않을 게르마늄 그릇이며 오래된 냄비들도 갈 때마다 조금씩 가져와 버린다.
아버님에게는 집을 가꾼다는 개념이 없다.
애초에 사람을 돌본다는 개념도 없으셨다.
일은 하되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없으셨던 것처럼.
꽃 한 송이 사다 심지 않은 마당은 잡초들 천지다.
난 잡초가 싫다.
내가 버리는 것들에는 어머님의 물건들도 있다.
한 때는 어머님에게 속했으나 이제는 돌아갈 대상을 잃은 물건들 중에서 신중하게 몇 가지를 골라낸다.
신발장에 들어 있는 낡은 신발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밑창이 닳고 가죽이 일어난 신발들.
서랍장 안에 세탁이 되지 않아 누렇게 변한 속옷들.
얼룩이 묻거나 해진 옷들. 구멍 난 양말들.
닳고 닳은 수건들도 버리고 꽁꽁 싸매 둔 새 수건들을 꺼내 놓는다.
시댁에 있는 시어머님의 물건들은 이제 단 하나도 어머님께 닿지 않는다.
어머님이 아끼던 재킷도, 아버님과 싸우고 홧김에 보란 듯이 장만한 밍크코트도 손수 만든 고운 모시옷도 다시 어머님이 입을 일이 없다.
그 물건들은 주인 잃은 미아가 되어 옷장 구석이나 서랍장 안 쪽에 조용히 풀이 죽어 쳐저있다.
시간과 함께 조금씩 흐릿해지다 종국에는 소멸할 것들.
어머님의 일부가 우리 곁에서 그렇게 조금씩 소멸해가는 것 같아서 버리야 할 걸 버리면서도 늘 서글픈 생각이 든다.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모실 때 한 보따리 싸 갔던 어머님의 옷들은 보따리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요양원에서는 관리하기 쉬운 옷을 어머님께 입혀 드렸을 것이다
아버님은 그 보따리를 오래도록 방구석에 그대로 놓아두셨다.
어느 날 내가 보따리 째 옷장 안에 넣었다.
그 보따리도 종국에는 사라지겠지.
안 방에 여전한 어머님의 흔적을 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있지만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가끔 떠올리는 아버님의 소회를 난 알 길이 없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내가 어머님의 것을 살금살금 버리고 치우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신지나 모르겠다.
알면 서운하실까?
아버님은 가끔 어머님의 근황을 물으신다.
어머님은 9명이 지내는 시설로 들어갔다가 군립요양원으로 옮겨 가셨다.
우리는 어머님이 첫 시설에 계실 때 보고 군립요양원으로 가신 다음에는 한 번도 뵙지 못했다.
오미크론 때문에 면회가 계속 금지되었다.
그사이 어머님이 오미크론에 걸렸다 회복되셨고 또 다른 분들이 오미크론에 걸렸고 그럴 때마다 요양원은 오랫동안 문을 걸어 잠갔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우린 요양보호사를 통해서만 어머님의 상태를 듣는다.
어머님은 비교적 잘 지내고 계신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아버님께 해드릴 때 아버님의 표정은 모호하다.
애정도 애틋함도 없어 보였는데 미안함이랄까 안쓰러움이랄까… 오래 함께 살 비비며 살았던 사람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슬쩍슬쩍 비친다.
지난번 팔순 생일날 아버님은 남편과 시동생을 데리고 호두나무 심은 밭 윗자리에 본인이 묻힐 자리를 다시 한번 알려주고 오셨다.
생의 의지보다 죽은 다음 들어갈 자리에 대한 욕망이 더 큰 것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지난번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의 가방을 정리하다 어머님이 끼시던 금반지를 발견했다.
두고 올까 하다가 손가락에 끼고 왔다.
어쩐지 어머님이 옆에 계신 것 같아 내가 갖기로 했다.
난 어머님이 몹시 보고 싶다.
남편을 닮은 손과 발이며 매끄러운 살이며 웃는 얼굴이 환한 모습이며 모든 것이 다 그립다.
어머님은 우리를, 자식을, 남편을, 며느리를, 손자 손녀를 다 잊으셨을 것만 같다.
다음 달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어머님이 그립고 잊지 않았으므로.
창고에 버려져 있던 박스 안에 젊은 어머님 사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