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순영 Jul 05. 2020

물의 소리

여행이야기 - 러시아


그것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처음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먼 곳을 보고 있었고 그것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안개 낀 밤거리를 걸을 때에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도 내 마음 속에선 한 가지 기대가 몽글몽글 자라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와의 첫 대면.

바이칼호수를 보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러므로 그 첫 대면의 순간은 내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경이로움이어야 했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이어야 했으며 오랜 시간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내 마음에 각인될 인상이어야 했다.

세계여행을 간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가고 싶냐는 내 질문에 그는 바이칼이라 했다.

그를 남겨두고 먼저 만나야 하는 바이칼이었으므로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돌아가 그에게 내가 느낀 감동과 그 벅찬 순간 내 마음에 차올랐던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해야했다.

바이칼 호수의 어느 한 점을 면해 있는 작은 마을에서 바이칼 호수를 마주하고 섰던 첫 순간,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건 경이로움도 아니었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도 아니었으며 드디어 바이칼 호수를 만났다는 감동도 아니었고 가슴 울컥하는 기쁨도 아니었다.

그건 실망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용히 혼자 만나고 싶었던 바이칼 호수위로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호수의 물은 맑았으나 그 뿐이었다.
단조롭고 평이했다.

한 때는 생생하게 빛났을지 모르나 지금은 빛이 바랜 흐릿한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바이칼 호수를 떠났다.
아직 바이칼 호수와 첫 대면을 한 것이 아니라고 아직 진짜 바이칼 호수를 본 것이 아니라고 바이칼 호수의 심장을 보기 전까지 아직 나의 기대는 유효한 것이라고 그 아침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호수를 떠났다.
그 때에도 그것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내가 알아 챌 순간을 기다리며.

내가 그것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두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날은 여전히 흐렸고 빗방울은 오락가락했고 물색은 흐릿했다.
이번엔 어떤 기대도 없었다. 별 생각 없이 호숫가를 걷고 있는데 문득 그것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이 느껴진 다음에도 한 동안 정체는 모호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까부터 내 마음을 끊임없이 간질이던 그것과 만났다.


그것은 소리였다. 물의 소리.


가볍고 투명해서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소리, 자잘 자잘하고 찰랑찰랑하는 소리, 바람이 불지 않는 수면 위를 조용조용 넘어와 가만히 자갈을 건드리는 소리작지만 세상의 소리를 다 품고 있는 것처럼 가득 차 있는 소리.
그 소리는 첫사랑처럼 조심스러웠고 아이의 미소처럼 천진했고 미숙한 사랑처럼 수줍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숨조차 크게 낼 수 없는 물의 소리였고 바이칼의 소리였으며 내가 두고 온 사람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소리였다.

그 물소리를 잊지 못해 저녁을 먹고 다시 호수를 찾았다. 그러나 물의 소리는 달라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서 호수위로 작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물의 소리는 바다의 파도처럼 거칠지 않았지만 분명 커져 있었고 더 이상 조심스럽지도 수줍지도 은근하지도 표면을 찰방찰방 치며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이제까지 바이칼 호수의 아름다움을 색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멋진 풍경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빛날 바이칼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름이 데칼코마니처럼 비치는 그림 같은 풍경을 기대하고 왔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바이칼의 아름다움은 색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바이칼의 아름다움은 소리에도 있고 물의 질감에도 있고 냄새에도 있고 바이칼이 담고 있는 풍경에도 있고 그 속에 품고 있는 생명에게도 있고 바이칼에 기대어 사는 사람에게도 있음을.
아름다움은 결코 어느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고 기대될 수도 없으며 규정되지도 않음을.

그 날 이후 나는 다양한 형태의 바이칼을 만났으나 단 한 순간도 실망하지 않았다.
흐리고 비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맑은 날에도,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바이칼 앞에서 나는 순수하게 기뻤고 즐거웠고 행복했고 가슴 벅찼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날 아침 들었던 물의 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 어디서도 그 물의 소리를 찾지 못했고 다시 듣지 못했다.


호수의 표면 위를 살금살금 넘어오는 그 물의 소리를 듣고 싶다면 흐리고 가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날 오후, 바이칼을 다시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날이 있을까?  같은 순간이 다시 반복될 수 있을까?
내가 그 소리를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날에 또 듣는다 해서 같은 놀라움과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같다.

그래서 이토록 마음에 여운이 남는 건지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펜화 도전 변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