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둔 페이지

[다정한 것들에 대하여 04]

by 도시소묘
책을 빌려줄 때 나는 거의 언제나 망설인다.

이 책이 돌아올까, 돌아온다면 언제쯤일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또 괜찮은 일일까.

그런 생각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빌려간 책이 석 달 만에 돌아왔다.

표지가 조금 낡았고 모서리가 살짝 접혔다.

괜찮아, 나도 책을 그렇게 대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책장에 꽂으려다가 발견했다.

78쪽이 살짝 접혀 있었다.

접은 흔적은 아주 얕았다. 누가 봐도 조심스럽게, 최대한 책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쓴 구석이 보이는 접힘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펼쳤다. 별것 아닌 문장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가장 믿을 수 없을 때는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아, 그랬구나.

친구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왜 여길 접었는지, 이 문장이 좋았는지, 아니면 그냥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려던 건지.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였다. 친구니까. 하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접힌 페이지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말이니까.


누군가 책을 읽으며 어떤 문장 앞에서 멈췄다는 것. 그 순간을 표시해두고 싶었다는 것.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메모를 하는 대신, 책의 몸에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려 애썼다는 것. 그 모든 게 말이었다.

책은 혼자 읽는 물건이다. 그런데 빌려준 책이 돌아올 때, 그 책은 혼자가 아니게 된다. 누군가의 시간이 그 안에 접혀 있다. 78쪽 어딘가에서 잠시 멈췄을 것이다. 커피를 마셨을 수도 있고, 창밖을 봤을 수도 있고, 그냥 천장을 보며 멍했을 수도 있다.

그 시간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접힌 페이지는 그 시간이 있었다고 말해준다.

이 문장 좋더라,라고 말없이 전하는 방법. 혹은 여기까지 읽었어, 나머지는 다음에,라고 약속하는 방법.

접힌 페이지는 말풍선 같은 것이다. 아무 글자도 없지만 분명히 뭔가를 말하고 있는.


책을 돌려받을 때마다 나는 먼저 페이지를 넘겨본다.

접힌 곳이 있는지. 밑줄이 그어진 곳이 있는지. 커피 자국이 남은 곳이 있는지. 그런 흔적들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이 책이 누군가의 시간 속에 있었다는 증거니까.

78쪽은 아직도 접혀 있다. 펴지 않았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그 페이지는 살짝 열린 채로 나를 기다린다. 누군가가 머물렀던 곳. 내가 지나쳤던 문장.


이제는 우리 둘의 문장.


책을 빌려주는 건 그런 거다. 내 책이 누군가의 책이 되고, 돌아와서는 우리의 책이 되는 것. 접힌 페이지 하나가 그걸 증명한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 있다. 접어두기만 하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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