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를 기다려주는 시간

[다정한 것들에 대하여 03]

by 도시소묘
대화는 흔히 ‘핑퐁’에 비유되지만,
가끔은 대화가 ‘숨바꼭질’ 같다고 느낀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기억의 창고를 뒤지고, 때로는 혀끝에서 맴도는 문장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날이나 서툰 진심을 전해야 하는 순간, 문장은 길을 잃는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말이지..." 하며 말줄임표 뒤로 숨어버리는 단어들.


이때 필요한 다정함은 화려한 조언이나 빠른 맞장구가 아니라, 상대가 자기만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침묵의 시간’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 짧은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지?"라며 상대의 문장을 가로채 결론을 지어버리거나, "빨리 말해봐"라며 재촉의 눈빛을 보낸다.

다정한 사람은 안다.

상대의 입술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그가 단어의 숲에서 길을 찾아 나올 때까지 가만히 눈을 맞추며 기다려주는 것이 얼마나 큰 지지인지를.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가 조금 느려도 괜찮아요. 여기서 당신의 완결된 진심을 기다리고 있을게요"라는 따뜻한 응원의 밀도로 꽉 차 있는 시간이다.

마침내 찾은 단어를 꺼내놓았을 때, 비록 그것이 조금 투박하거나 세련되지 못할지라도 "기다려줘서 고마워"라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을 넘어 영혼의 접촉이 된다.


침묵을 견디는 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서툰 문장을 대신 끝내주지 않는 것, 그의 마침표를 탈취하지 않는 것. 그것은 상대의 존재 자체를 오롯이 인정해주는 가장 고요하고도 강력한 행위다.

오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의 말이 멈춘 자리에서 속으로 천천히 다섯까지 세어보고 싶다. 그 5초의 공백이 상대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정리할 가장 안전한 요새가 되어줄 것이다.


다정함은 때로 단 한 문장을 위해 비워둔 빈 공간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난다.


우리는 늘 정답을 먼저 말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실 삶의 결정적인 진실은 머뭇거림 뒤에 숨어 있다. 단숨에 쏟아내는 매끄러운 말들에 마음이 갈때가 많다. 하지만 더듬거리고, 멈추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길어 올린 단어야말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진심이다.

기다림은 상대를 향한 가장 품격 있는 존중이다. 내가 당신을 이토록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언어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증명이 된다. 설령 끝내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채 대화를 마친다 해도 상관없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대신,

나의 서툰 속도를 기꺼이 견뎌준이에 대한 든든한 신뢰를 안고 돌아갈 것이다.


세상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들이 더 많다.

그 비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것. 상대가 스스로 문장을 매듭지을 때까지 나의 시계를 잠시 멈춰두는 것. 그런 무심한 기다림들이 모여 깨지기 쉬운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단단한 유대를 맺는다.

오늘도 나는 서툰 누군가의 말줄임표 앞에서 기꺼이 길을 잃을 준비를 한다.


당신의 마침표가 어디에 찍히든,

나는 그곳까지 나란히 걷는 다정한 그림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