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사이 #005
크레파스, 색연필, 사인펜, 물감.
아이에게 그것들은 그림 도구라기보다 장난감에 가까웠다. 그리라고 꺼내준 적보다, 원하면 언제든 만질 수 있도록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대신 약속은 있었다.
그림은 스케치북이나 메모지처럼 정해진 영역에만 그리기로. 벽이나 바닥, 물건에는 그리지 않는다는 규칙이었다.
함께 미술을 하는 날에는 스케치북뿐만 아니라 화장지나 박스지, 욕실 벽면처럼 그날 정한 재료와 공간 안에서는 마음껏 그리게 했다.
그 약속의 경계 안에서 나는 되도록 지켜보는 쪽에 머물렀다.
아이가 그리는 것, 만드는 것에 익숙해지길, 일상이 되길 바랐다.
미술 시간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하루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원했다.
그래서인지 남길 만한 결과물이 없는 날들도 많았다.
몇 번 휘적이다 말고 끝나거나,
색을 섞다 장난처럼 번져버리거나,
그린 것보다 지운 흔적이 더 선명하게 남은 날들.
그날들은 대개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아이와 바닥에 앉아 있다 손을 씻기고, 정리하고,
다음 놀이로 넘어가다 보면 ‘기록’이라는 단어는 늘 한참 뒤에야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재료를 두 번, 세 번 반복하며 아이는 도구를 다루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나는 개입해야 할 순간과 물러서야 할 타이밍을 가늠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그저 끄적이던 선이 다음 날에는 화면을 채우는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장난처럼 쥐던 붓은 어느 순간부터 목적을 가진 손놀림이 되었다.
그림이 되지 않았던 날들은 결과를 남기지 못한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결과가 가능해지기 전까지
충분히 쌓여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쌓인 경험 위에서 비로소 결과물로 남게 된 이야기들을 꺼내보려 한다.
이날들 덕분에 가능해진,
느리지만 하나씩 아이와 함께 쌓아온 기록들이다.
오늘도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한 ‘사이’의 시간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