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처럼 보이지만, 그림입니다

그리는 사이 #008

by 온아

33개월.​
사인펜을 쥔 손은 아직 ‘그리기’보다 ‘움직이기’에 더 가까웠다. 종이 위에서 색색의 선은 멈추지 않고 달렸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며 오늘 어떤 질문이 ‘길’이 될지 고민했다.

"무얼 그리는 거야?"

아이는, 처음부터 정해 놓았던 듯 왼쪽에서 크게 색을 쌓아 올린 덩어리를 두고 말했다.

“무지개야.”

나는 그 답에 기대어 한 발 더 나아갔다.

“무지개 미끄럼틀 같네.”

아이의 눈이 더 멀리 열렸다.

“어린이집 놀이터는 파랑이야. 무지개 미끄럼틀이면 좋겠어. 놀이터에는 개미도 있고 거미도 있어.”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하며 아이가 세계를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개미랑 거미는 무슨 색이었어?”

아이는 망설임 없이 검은색을 꺼냈다. 그리고 검정으로 선을 덧그었다.

“눈은 두 개야.”

눈이라며 점을 두 개 찍고, 찌그러진 선으로 입도 그렸다. 나는 여기서 멈출지 더 이어 물어볼지를 고민했다.

질문이 아이의 손을 멈추게 할 때도 있고, 더 멀리 데려갈 때도 있었기에.
오늘은 후자였다.

“엄마는 솔방울도 본 거 같은데~?”

“솔방울은 갈색이야.”

갈색이 등장하고, 또 하나의 존재가 종이 위에 태어났다.

​“하늘에 구름도 있어.”

이번엔 하늘색이 올라왔다.


무지개에서 놀이터로, 놀이터에서 개미와 거미로, 솔방울로, 구름으로.

이 연결은 얼핏 산만해 보이지만, 아이에겐 한 번도 끊기지 않은 이야기였다.​
선은 제멋대로 뻗는데, 아이의 말은 정확했다.

아이의 그림은 아직 ‘형태’가 아니라 ‘명명’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형태를 표현하고 이름이 붙는 게 아니라, 이름이 붙는 순간 대상이 된다.

사인펜으로 그린 선들은 겹치고 엉키고, 여기저기 튀어나왔지만 그 안에는 아이가 세상을 정리하는 방식이 들어 있었다.

색을 고르고, 명명하고, 이야기를 늘리고, 필요한 요소를 추가하는 방식.

그러니 이건 낙서가 아니다.​

아이는 선을 그린 게 아니라, ‘무지개’라는 이름을 먼저 세우고 그 주변에 세계를 붙였다.

아이, 본인 언어로 만든 지도에 더 가깝다.
어른의 눈에는 아직 길이 보이지 않지만, 아이는 목적지를 알고 있다.​

나는 오늘도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럼 이 그림 제목은 뭐야?”

"무지개 놀이터"

아이는 또 자신만의 시선으로 대답한다.
오늘은 그 대답이, 선보다 더 선명한 ‘그림’이 되었다.

문시온 33개월_ 무지개 놀이터@2025
지금은 난화기 후반에서 전도식기로 넘어가는 입구쯤. 아이는 선을 ‘모양’으로 만들기보다, 먼저 ‘이름’을 세우고 색을 골라 그 세계를 붙인다. 다음엔 사람이나 집처럼 자주 꺼내 쓰는 상징이 언제 자기 그림에 자리 잡는지도 지켜보려 한다.


오늘도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한 ‘사이’의 시간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