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사이 #009
특정하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벤트성으로 원데이클래스에 참여해 본다.
아이가 잘하길 바라는 마음보다, 마음껏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솔직히는, 집에서의 미술활동을 잠시 쉬어가려는 마음으로.
돈을 내고 들어간 체험공간에서는 내가 판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준비된 재료와 동선, 정해진 시간과 규칙이 있다. 그 프레임 안에서 놀고 나오는 아이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나에겐 단비 같은 시간이다.
창 너머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나의 손은 비어 있었다. 집에서는 늘 뭘 깔고, 뭘 닦고, 다음을 준비하느라 손이 바쁜데,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다.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잠깐 숨을 고르면 된다. 잠깐의 멍함까지도 허락되는 시간.
아이가 들어간 설탕방의 설탕은 가루로도, 눈처럼도, 모래처럼도 존재했다.
손에 묻었다가 툭툭 털리면 사라지고, 모이면 다시 덩어리가 된다.
쥐었다가 흘려보내고, 컵으로 옮겼다가 다시 쏟고, 체로 흔들며 ‘내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체를 흔들 때마다 바닥에 얇은 층이 생겼고, 아이는 그 층을 다시 손바닥으로 밀어 모았다.
설탕이 ‘흩어짐’과 ‘모임’ 사이를 오가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무언가를 만들자고 서두르지 않았다.
이날의 중심은 결과물이 아니라, 순수하게 재료를 탐색하는 시간인 듯했다.
아이는 설탕의 가벼움과 무게, 흐르는 방식과 멈추는 순간을 온몸으로 느꼈다.
통제하는 이도 없었고, 조절이 되지 않아도 됐다.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미술은 실패가 모양으로 남지 않는다. 남는 건 흩어진 흔적과, 방금까지의 흥분이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이건 눈 같아, 모래 같아?”
“지금은 붓는 거야, 담는 거야?”
아이가 대답을 했는지는 몰라도,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집중이 시작되면 말은 줄고, 손은 더 분명해진다.
쏟아붓는 손과 옮겨 담는 손이 다르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리려는 듯했다.
십여 분이 지나 다음 활동으로 넘어갔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각설탕을 만져보고, 미니절구와 공이로 빻아보기도 하고, 물에 녹여보기도 했다.
물성이 달라졌을 뿐, 탐색의 연장선이었다.
절구 앞에서는 아이의 손이 잠깐 멈췄다.
단단했던 각설탕이 공이에 눌리자 부서지고, 다시 가루가 되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
한 번은 힘을 주어 ‘쿵’ 하고 내리쳤고, 한 번은 살살 눌러보며 어떻게 부서지는지 살폈다.
물에 닿아 순식간에 사라질 때는, 사라진 자리를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없어지는 것’이 흥미로운 듯했다.
수업의 마무리는 선생님이 해주셨다.
교실 한켠의 기계에서 솜사탕이 나왔고 아이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혼란이 달콤한 한 덩어리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퍼포먼스미술은 ‘발산’이 가능하도록 행동반경을 열어준다. 하지만 그 발산이 기억으로 남으려면, 누군가의 프레임이 필요하다.
이날은 준비된 공간과 선생님이 그 프레임을 맡아 주었고, 아이는 마음껏 흩뿌린 뒤 선생님이 만들어 준 ‘완성’을 맛봤다.
아이에게는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규칙을 배우고 조절을 알아가야 하는 36개월 이후의 퍼포먼스미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한 재료의 다양한 물성 탐색도 물론 좋다.
다만 흩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행동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흔적의 기록이든, 정리든, 간단한 만들기든.
발산 뒤에 ‘회수’가 붙을 때, 놀이는 배움이 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결과물이 아닌, 아이 스스로 마무리까지 가보는 것. 엄마의 숙제가 생겼다.
이날의 혼란은 달콤했고, 달콤함은 빨리 사라졌다.
하지만 그 달콤한 혼란 덕분에 엄마인 나는 잠깐의 쉼을 얻었고, 느끼는 바가 있었고, 조금은 다른 다음을 기약했다.
오늘도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한 ‘사이’의 시간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