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도쿄에 가야겠다

길을 잃어도 괜찮은 도시가 있다는 것

by 온빛

그때가 몇 살이었을까. 스물여덟이었는지, 스물아홉이었는지.

회사에서는 괜찮은 척 웃었고, 주말이면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고, 화장품 매장에서 제일 빛나는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속은 자꾸 비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 해본 것 같다. 더는 살 이유가 있을까.’


그 생각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가족에게도.

혼자 마음속으로만 결심했다.

이번 여름휴가가 끝나면, 떠나야겠다고.


그렇게 나는 도쿄행 비행기표를 샀다.

이 이상은 필요 없을 것 같아 떠난 여행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첫날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구글 지도를 보며 캐리어를 끌고 몇 바퀴를 돌자 식은땀이 났다.

그때 한 일본 청년이 다가와, 서툰 영어와 손짓으로 길을 찾아주었다.

도착하자마자 길 잃은 한국인과, 약속이 취소돼 심심하던 도쿄 청년은 결국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No problem”을 서툴게 연발하던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맥주는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첫 잔답게 짜릿했다. 골목 끝에서 풍겨오는 고기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도쿄의 차가운 골목을 갑자기 따뜻하게 데웠다.


다음날에는 부산에서 알게 된 도쿄 친구를 만났다.

정장 차림의 전형적인 일본 회사원이 된 그는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을 내어 그의 최애라는 계란 닭 덮밥 집에 데려가 주었다.

계란을 꼭 완숙으로만 먹던 나는 젓가락질을 멈칫했지만,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사라지는 맛에 묘하게 위로를 받았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내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요코하마에서는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언니가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몇 년은 알고 지낸 듯,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언니는 내게 끊임없이 물었다.

“넌 지금 행복해?”

“정말 원하는 게 뭐야?”

“왜 그걸 못 하니?”

그 질문들이 내 안을 파고들었다.

‘아, 나도 아직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강 향이 강한 반찬을 나는 못 먹겠다고 했고,

언니는 그걸 좋아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언니의 남편은 우리를 데리러 나타나,

언니를 바라보며 살뜰히 챙겼다.

그 시선이 낯설고, 부러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만난 거지?’

비법을 물어봤지만, 나는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코네의 온천 마을에서는

유메미라는 열아홉 살의 소녀를 만났다.

온천 게스트하우스의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데, 작은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꿈을 본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유메미는 수줍게 맥주잔을 쥐고 내게 말을 걸었다.

“혼자예요?”

그 말에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나왔다.

이름처럼 꿈을 꾸듯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이 덜 무겁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아무도 나를 치료하려 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힘내’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의 표정과 손끝, 숨결과 말투가 내 마음을 천천히 덮었다.


그렇게 나는 도쿄에서 낯선 사람들과 웃고, 대화하고,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도쿄의 밤공기, 골목의 소음, 그들의 다정한 눈빛과 질문들이 나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운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못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쿄를 수없이 다시 찾았다.

그 낯선 골목과, 바람결과, 낮게 깔린 네온이 나를 살게 했다.

한국과 닮은 듯 다른, 그 묘한 도시가 나를 품어주었다.

그 속에서 나는 살아갈 이유를, 이유 아닌 이유로 주워 담았다.


오늘 문득, 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 졌는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또 지쳤기 때문이겠지.

마음 한쪽이 무겁고 답답해지면

나는 도쿄를 떠올린다.

그곳의 언덕과 골목, 그리고 그 사람들을.


혹시 이번에도, 도쿄가 내 마음을 덮어주지 않을까.

길을 잃어도, 누군가 나타나 내 짐을 들어주고,

맥주잔을 부딪쳐주며 “괜찮아”라고 웃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도쿄를 생각해 냈다.

그때의 사람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나를.

그 따뜻한 시선과, 미소와,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졌다.


조만간, 도쿄에 다시 가야겠다.

길을 잃어도,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길을 가르쳐주고,

맥주도 사주고, 덮밥도 떠먹여 주겠지.

그래, 이번에도 어찌어찌 살아갈 이유를 주워 담고 돌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