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프는 미소 교정기보다 효과가 좋았다

록키 산맥이 내 얼굴에 남긴 선물

by 온빛

억지로 올린 웃음은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밴프에서 배운 웃음은 오래 남았다.


요즘 나는 책상 앞에 거울을 두고 산다. 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무표정한 얼굴이 보인다. 너무 굳은 얼굴이 싫어 충동적으로 ‘미소 교정기’를 샀다. 입술 끝에 끼우고 억지로 웃게 만드는 괴상한 도구. 하루 몇 분씩 끼면 자연스러운 웃음 근육이 생긴다는데, 효과는 글쎄….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그런 웃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힘주지 않아도, 풍경이 스스로 내 표정을 바꿔주던 순간. 바로 8월의 밴프였다.


밴쿠버에서 밴프까지는 무려 16시간 버스. 비행기를 타면 캘거리에서 갈아타야 하니, 환승 없는 직행의 유혹을 택했다. 어차피 나는 어디서든 잘 자니까. 문제는 내 고개가 예정에 없던 쪽으로 쓰러졌다는 것. 깜빡 눈을 떴을 때, 옆자리 캐나다 남자가 주먹을 얼굴 옆에 두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었다. 순간 감기인가 싶었지만 곧 알았다. 이게 북미식 ‘저기요’ 구나. 직접 깨우지 않고 은근히 신호를 주는 방식. 나는 그날 밤, 록키로 가는 길에서 첫 문화 수업을 들었다.


밴프에 내리자마자 또 다른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 중순인데도 공기는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타운 초입 루츠 매장으로 달려가 후드티를 하나 사 입었다. 부드러운 기모가 피부에 닿는 순간, 비로소 몸이 풀렸다. 돌아보면 그건 옷이 아니라 밴프의 공기와 연결된 첫 기억이었다.


그리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간 록키 산맥. 겹겹이 이어진 산맥의 선율과, 눈부신 에메랄드빛 호수의 울림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표정 근육이 스스로 녹아내렸다. 밴쿠버에서 찍은 사진 속 나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밴프의 나는 오래전부터 웃는 사람처럼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음을 교정하려 힘주지 않아도, 풍경이 알아서 해제해 준 것이다.


그 풍경은 혼자만 간직하기엔 너무 컸다. 부모님이 떠올랐다. 꼭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아직 만나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까지. 다른 여행지에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다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는데, 풍경은 끊임없이 ‘함께’라는 단어를 불러냈다. 그렇게 내 마음 깊은 곳의 사람들까지 불쑥 올라왔다.


호수 앞에서는 또 다른 장면을 보았다. 서양 여행자들이 갑자기 옷을 훌렁 벗더니 비키니 차림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물에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자연 앞에서 “나 + 자유”라는 공식처럼 당당히 서 있었다. 나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나도 해볼까? …아, 아니다.” 자유는 멋져 보이지만, 막상 실천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걸 그날 배웠다.


이상하게도 밴프는 내 얼굴만이 아니라 내 관계까지 흔들어놓았다. 혼자 서 있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풍경은 자꾸 ‘누군가와 함께’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밴프는 나에게 단순한 절경이 아니라, ‘내가 누구와 나누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준 곳이었다.


지금 8월의 공기를 다시 맞으니, 그때의 밴프가 떠오른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의 웃음은 금방 사라지지만, 자연이 준 웃음은 오래 남는다.


밴프는 미소 교정기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풍경 하나로, 내 얼굴을 완전히 바꿔주었으니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미소 교정기는 결국 효과가 없어서 이미 버렸다. 밴프만큼은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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