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들의 방명록을 읽고,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왜 이렇게 늦었을까

by 온빛

1인 북카페를 처음 가보았다.


예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 볼일을 마치고 지나가던 길에 문득 떠올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처럼 꾸며진 공간과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 그리고 한쪽에 놓인 금붕어 수족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물이 천천히 순환하며 내는 소리가 공간의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부엌에서 결제를 하고 음료를 받은 뒤, 커튼과 가벽으로 나뉜 개인 좌석들 사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독서실처럼 각자의 세계가 조심스럽게 분리된 공간. 잔잔한 음악과 수족관의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이미 대부분의 자리는 차 있었다. 다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 조용함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았다.


음악을 들을까, 책을 펼칠까 잠시 망설이던 사이, 책상 위에 놓인 방명록이 눈에 들어왔다. 흔히 있는 방문 노트일 거라 생각하며 아무 기대 없이 펼쳤는데, 그 안에는 짧은 인사가 아니라 일기처럼 빼곡히 적힌 글들이 있었다. 매 페이지마다 다른 필체, 다른 리듬, 다른 온도의 문장들. 누군가는 진로를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관계를, 또 누군가는 사랑과 이별을 고백하고 있었다.


글들은 생각보다 깊었다.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볼 줄 아는 문장들이었다. 감정을 대충 덮어두지 않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글들이었다. 놀라운 건 그 대부분이 10대와 20대의 글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세대는 가볍다, 생각이 얕다 같은 말을 너무 쉽게 들어왔던 터라, 이 방명록은 그 모든 말을 조용히 반박하고 있었다.


읽다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부러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삶을 이렇게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괜히 인생을 헛산 것 같고, 아무 생각 없이 세월만 흘려보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늦었을까.'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노트를 덮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하고 있는 고민을, 나 역시 지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은 특정한 나이에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평생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다른 속도로,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에 도착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이른 나이에 자기 상처를 마주하고, 누군가는 한참을 돌아서야 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중요한 건 언제 시작했느냐보다, 결국 그 앞에 섰다는 사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마 고민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자세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고민 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을 텐데, 이제는 그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바깥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아프지만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만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 슬픔과 불안을 느끼되,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것.


그게 단단해진다는 말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 방명록을 쓰고 돌아간 사람들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 글을 적는 순간만큼은 자기 마음을 내려놓고 나왔기를 바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이 공간은 아주 조용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결국 그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사실 남길지 말지 고민하다가 남겼다. 익명이라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나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의 글을 남겼다.


그런데 펜을 놓고 나서야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건 이 방명록을 읽을 낯선 누군가가 아니라, 조금 전까지 노트 속 젊은 문장들 앞에서 작아졌던 나 자신을 향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다고, 늦지 않았다고, 지금도 충분하다고.


책을 읽으러 들어온 곳이었지만, 나는 나이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어 돌아왔다. 아마 그래서 이곳이 유난히 조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각자가 자기 삶의 속도로, 자기 질문을 안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북카페를 나서는 길, 물소리는 여전히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내 안의 어떤 조급함까지 함께 씻어 내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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