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회사에 다시 출근하는 기분

퇴사 3부작 #3

by 온빛

퇴사하고 2년 뒤, 어쩌다 보니 다시 두 번째 회사로 돌아오게 됐다.


주변 사람들은 물었다. "미쳤어? 도망치듯 나온 회사를 왜 다시 가?"


솔직히 나도 처음엔 망설였다. 그 회사 건물만 봐도 가슴이 답답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그곳으로 출근한다는 거지? 근데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망치기 전의 나는 회사의 문제를 내 문제로 만들었다. 이번엔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달라진 것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회사에 다닌다.


모든 일에 감정을 싣지 않고, 모든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필요한 만큼만 책임진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래도 내가 하면 빨리 끝나잖아"라고 했을 일을 이제는 "이건 구조의 문제예요. 일의 경계를 정확히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미팅에서 "한번 결과를 보고 싶다"는 말에 "알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을, 이제는 "언제까지 어떤 형태로 필요하신가요?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나요?"라고 되묻는다. 질문이 많아졌다고? 그래, 많아졌다. 그게 살아남는 법이더라.


예전의 나였다면 상사의 공감에 속마음까지 털어놨을 것을, 이제는 "네, 그렇네요"라고 적당히 맞장구만 친다. 회사에서 친구 만들러 온 게 아니니까.




#효과


그렇게 살다 보니, 확실히 덜 아프다. 욕도 안 나온다. 통화 중에 모니터를 던질 것 같은 순간도 없다. 퇴근길에 '내일 회사 폭발했으면'이라는 생각도 안 한다.


그냥... 그냥 다닌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한다. 감정의 기복 없이.


성공? 어쩌면 그렇다.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요즘 회사가 재미없는 건 내가 너무 선을 긋고 사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회사에서의 생기까지 같이 차단해 버린 건 아닐까. 팀원들과 점심 먹으면서도 적당히 웃고, 적당히 공감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이게 맞는 건가 싶다.


그래서 또 생각이 자연스럽게 퇴사 쪽으로 흘러간다. 이번엔 힘들어서가 아니다. 심심해서, 무덤덤해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 마치 회색빛 하루를 반복하는 기분.


예전엔 너무 아파서 도망쳤는데, 이번엔 너무 안 아파서 도망치고 싶다. 이게 말이 되나? 근데 진짜 그렇다. 차라리 예전처럼 화가 나거나 억울하면 감정이라도 있는 건데, 지금은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그게 더 무섭다.




#재조정 중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을 조금 다르게 본다. 이건 다시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회사와의 거리를 재조정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예전의 나는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쳤고, 퇴사 직후의 나는 너무 멀리 달아나버렸고, 복귀한 지금의 나는 너무 멀리 서 있다가 재미를 잃은 상태다.


아마 이제 필요한 건 다시 예전처럼 마음을 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버티는 게 아니라, 선은 지키되, 살아 있는 감각은 남겨두는 법일 것이다.


회사를 인생의 전부로 두지도, 완전히 의미 없는 공간으로 밀어내지도 않는 것. 그 중간 어딘가에서 오늘 하루를 무사히, 그리고 조금은 덜 무미하게 보내는 것.




#적당한 거리 찾기


지금의 나는 그걸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일은 하되, 나를 갈아 넣지 않기.

관계는 맺되, 경계는 지키기.

열심히 하되, 목숨 걸지 않기.


말은 쉽다. 실천은 어렵다. 가끔은 예전처럼 확 열심히 하고 싶기도 하고, 가끔은 그냥 다 집어치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두 번 도망쳐본 사람으로서 이제는 안다. 도망은 해결책이 아니라 그냥 도망일 뿐이라는 걸. 중요한 건 도망치지 않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 거리는 회사마다 다르고, 시기마다 다르고, 내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정답은 없다. 그냥 계속 조정하면서 찾아가는 수밖에.




#지금


지금 나는 두 번째 회사에 세 번째로 다니는 중이다. (복귀니까 세 번째 맞는 건가?)


예전처럼 욕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출근이 즐겁지도 않다. 그냥 적당히 괜찮다.


그리고 어쩌면, 적당히 괜찮은 게 가장 오래갈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불타오르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그냥 은은하게 타오르는 정도.


완벽한 상태는 아니다. 여전히 헷갈릴 때가 많다. 이게 맞는 건지, 너무 방어적인 건 아닌지. 하지만 적어도 욕은 안 나온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괜찮은 것 같다.




#퇴사 3부작을 마치며


두 번의 퇴사를 거쳐 다시 돌아온 지금, 나는 여전히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퇴사에서는 너무 솔직해서 다쳤고,

두 번째 퇴사에서는 너무 참아서 무너졌고,

세 번째(복귀한 지금)는 너무 거리를 둬서 심심하다.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안다. 회사 다니는 데 정답은 없다는 걸. 그냥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준비하고, 필요하면 또 조정하면 된다는 걸.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의 내가 또 바보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때 참고 더 다녔다면 과연 아무 일도 없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더 큰일이 벌어졌을까.


답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때 도망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온 덕분에, 이번엔 조금 더 잘 다닐 수 있다는 것.


도망도 기술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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