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중에 욕이 나온 날 (퇴사 시그널)

퇴사 3부작 #2

by 온빛

첫 번째 회사에서 배운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이번에는 절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상사에게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감정을 컨트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잘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나고 나니, 나는 또다시 퇴사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너졌다.




#일 잘하는 사람의 저주


두 번째 회사에서 나는 5년을 다녔다. 그때의 나는 최적의 상태였다. 일이 손에 붙었고, 처리 속도는 빨랐고, 실수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일이 잘 돌아가니까, 일이 계속 나에게만 굴러왔다.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그런데 나는 그 낮은 곳이었다.


상사는 막아주지도, 대신해주지도 않았다. "저 사람이 다 할 수 있으니까"라는 침묵의 합의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게 인정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냥 편한 거였다. 능력 있는 직원이 아니라 편한 직원이었던 거다.




#침묵의 합의


지시는 애매했고, 기대치는 불명확했다. 답답했지만 나는 여전히 빨리 처리했다. 미팅에 들어가면 다들 말했다.


"한번 결과를 보고 싶다."


그 말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결과를 보고 싶은 건 항상 내 일이었고, 다른 사람 일은 "천천히 해도 괜찮다"였다.


가장 힘이 없던 나는 늘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내 할 일 목록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 배운 대로,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상사에게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일을 했다. 빨리, 정확하게, 묵묵히.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나는 내가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만 느꼈다. 그냥 좀 바쁜가 보다, 이 정도는 다들 하지 않나, 싶었다.


진짜 문제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느 날, 업무 관련 다른 회사 사람과 통화하다가 내 입에서 'ㅆㅂ'이 튀어나왔다.


나는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런 욕을 한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조차. 착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그런 내가 생각할 틈도 없이 욕을 내뱉었다.


다행히 전화였다. 상대는 내 표정도, 정확한 발음도 알지 못했다.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죄송해요, 잘못 들으신 것 같아요" 하고 얼버무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참고로 그 통화에서도, 나는 또 하나의 업무를 받았다. 욕을 하고도 일을 받는 이 아이러니.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걸.




#공포


전화를 끊고 난 뒤, 이상하게 무서워졌다.


'아, 이 상태로 계속 다니면... 내가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는데?'


다음엔 전화가 아니라 대면 미팅일 수도 있고, 욕이 아니라 책상을 엎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모니터를 던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공포가 나를 퇴사로 밀어냈다.


그래서 나는 확실하게 그만뒀다. 퇴사 사유? "개인 사정." 진짜 사유? "나 지금 위험해요."




#몸이 보내는 신호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까지 힘들 일이었나 싶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깜냥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퇴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꽤 만났다. 다들 자기만의 '한계 신호'가 있더라.


어느 후배는 말했다. 모니터 속 이메일을 보다가 이유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순간 퇴사를 결심했다고. 이메일 내용이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업무 메일이었다. 근데 눈물이 났다고.


또 어떤 선배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30분간 시동을 끄지 못했다고 했다.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서. 차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결국 그날 연차를 냈다고.


나는 이메일 보며 운 적도, 주차장에서 멈춰 선 적도 없다. 하지만 그건 비교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머리로 이해할 일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퇴사 신호다. 욕이든, 눈물이든, 시동을 못 끄는 것이든.




#깨달은 것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때의 나는 일을 못해서 무너진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법을 모르고 일해서 무너졌다는 사실을.


두 번째 퇴사에서 배운 것: 일을 잘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소진된다. 빠르게 처리하고, 대신 책임지고,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결국 가장 늦게 보호받는다.


그때의 나는 일을 거절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집어삼키는 구조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으니까"가 아니라 "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데?"를 물어야 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는 감정을 너무 많이 드러내서 무너졌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감정을 너무 억눌러서 무너졌다.


한쪽 극단에서 다른 쪽 극단으로 달려갔을 뿐, 나는 여전히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퇴사하고 외국에서 1년을 보냈다.

이제 일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코로나가 터졌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다른 회사들 면접을 보다가 어쩌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다시 두 번째 회사로 돌아가게 됐다.


주변 사람들은 물었다. "미쳤어? 도망치듯 나온 회사를 왜 다시 가?"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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