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봄

"우영우 아니고 봄이 엄마로 살기 (봄의 왈츠)"

by 온벼리


10년간 뇌전증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던 봄이는 고등학교 1학년의 새 학기를 앞둔 어느 날 새벽에 발작을 일으켰다. 각자의 방을 쓰고 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내 방은 항상 봄이 방 건너편에 있다. 닫힌 문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내는 소리였다. 잠결에 이상함을 감지하고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봄이는 침대에 누워 발작을 하고 있었다. 약간의 의식이 있었는지 경련으로 몸이 비틀리자,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였다.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남편을 깨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남편은 벌건 토끼 눈을 하고 허둥댔다.

예전에 비하면 발작의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몇 분 사이에 발작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119 구급대원이 도착했을 때는 부축하고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간단한 물음에 대답하고 비틀 거리며 걷기도 했지만 나중에 물어보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였다.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체온이 37.5도가 넘는다는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했다. 예전에 다니던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구급차를 타고 왔는데 문전박대를 당하기는 처음이다.

이사 오기 전 다녔던 병원은 거리가 너무 멀다. 현재 진료 기록이 있는 조금 더 떨어진 대학병원까지 다시 구급차를 타고 20분을 달렸다. 도착한 병원에서도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체온 측정 후 대기해야 했다. 코로나가 응급환자를 여럿 잡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체온이 떨어져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주 응급한 상황이었다면 멱살 잡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약물 없이 발작은 풀렸지만 아이는 어지럽다며 잠들었다. 응급실에서 두 시간을 더 머물다 집으로 돌아왔다.


신촌 세브란스 뇌신경외과 진료를 위해 한 달 반을 기다려야 했다. 진료 이후 일 년 동안 네 번의 뇌파검사를 했고 약 처방 없이 경과를 지켜봤다. 담당 교수는 일시적인 발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뇌전증으로 발작했던 아이들은 크면서 어쩌다 한두 번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나가는 발작을 뇌전증으로 오인해서 약을 쓰기 시작하면 또 몇 년 동안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으니 약 처방 없이 조심하며 지켜보자고 했던 것이다. 다행이었다. 섣불리 약을 처방하지 않은 것도, 이후로 발작이 지속되지 않아 괜찮을 거라는 진단을 받은 것도... 뇌전증이 재발한 아이들은 약물 없이 6개월 이상 발작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일 년 넘게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으니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또 종결했다.

담당 교수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교수는 여전히 쌀쌀맞고 잘난 척을 하지만 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의사였다.


다시 발작을 일으켰으니 또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약해지면 다시 뇌전증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스트레스와 피곤, 건강의 모든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


봄이는 내게 너무 어려운 아이다. 예측할 수 없음은 마음을 더 불안하고 힘들게 만들다.


이번 발작을 겪으면서 봄이는 내 힘만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졌다.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책임감을 덜은 느낌이었다.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은 아니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 인내하되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너를 너로, 나를 나로 인정하며 오늘에 충실하기로 했다.


봄이는 영구 장애를 가지고 있고 나는 죽기 전까지 봄이를 책임져야 하는 절대적인 보호자다.


나는 여전히 광야에 서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어쩌면 끝없이 광야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살이 얼어 터지고,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에 지쳐 쓰러지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광야에 있지만 나의 광야는 지금 봄이다.

쉴만한 그늘에 감사하고, 푸른 봄빛에 설레어 살랑 부는 바람에도 노래를 부른다.

지쳐서 쓰러진다 해도 다시 일으키실 하나님을 믿고 나는 오늘도 걷는다.

사람들은 각각의 어려움과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고난의 모양과 무게는 다르지만 모두 자기만의 짐을 지고 걷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당신의 어제와 오늘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따스한 아침 햇살도, 살랑 부는 바람도, 흩날리는 꽃잎도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충실하게 살아갈 당신의 오늘과 내일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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