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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벼리 Nov 02. 2023

이 죽일 놈의 신세에서 구해 준 사람

에세이 - 이뻔소

 

 회사 밖에서는 김 과장을 민수 씨라고 불렀다. 퇴근길 집에 다다랐을 때 민수에게 말했다.

 "할 말 있는데... 조용한 곳에 차 좀 세워보세요."

 가을비가 한여름 장마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날씨만큼 흐린 내 표정에 그도 긴장하며 골목에 차를 세웠다.

 "할 말이 뭔데?"

 "음...... 사귀었던 사람이 내 이름으로 사업을 했는데... 빚이 있어요."

 "...... 얼만데?"

 "오천만 원이요."

 한참 말없이 한숨만 쉬던 그가 물었다.

 "어쩌다가?"




 휴학 중 최 모 씨와 사귀게 되었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청년이었다. 카드사에서 한참 카드를 남발해 신용불량자가 수두룩하던 시대였지만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신용카드는 써본 적도 없었다. 최 모 씨는 자신의 신용이 좋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다며 동업을 하자했고 내 명의로 사업자를 만들고 카드도 만들었다.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대출을 받아 사업 자금으로 썼다. 나중에는 금방 메꿀 수 있다며 고금리 대부업체 돈까지 끌어다 썼다. 그는 사업의 운영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고 끝도 없이 거짓말을 했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연체는 당연한 일이었고 연체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칠천만 원이 되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나는 자살기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어느 날 부재중 전화에 음성메시지를 확인했다. 여자의 한숨 소리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고 둘은 말씨름을 하다 이내 끊었다. 아무리 들어도 최 모 씨의 목소리였다. 경찰서를 찾아가 음성 메시지의 그녀가 최 모 씨를 협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신원 조회를 한 경찰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는 돈을 갚지 않고 사라져 수배된 사람이라고... 찾아오면 신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에 갔다 왔음을 최 모 씨에게 알리자 그는 얼른 달려와 벌벌 떨며 빌었다. 음성메시지의 그녀는 돈을 빌려 준 사람이고 돈을 갚지 않자 화가 나 너에게 전화한 거라고... 경찰이 자기를 찾는 것은 예전에 사업이 망했을 때 빚이 생겨서 그런 거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나는 그 말을 또 믿었다.


 며칠 뒤 그는 제 멋대로 서울에 아는 형님에게 부탁했다며 내가 이사 갈 집을 비싸게 계약해 버렸다. 이삿날 같이 짐을 나르던 그의 가방에서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처음 보는 전화기는 그의 것이었고 전화를 건 사람은 마누라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마누라! 그녀의 이름은 은희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는 은희라는 여자를 꼬셔 또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전세자금을 빼 그에게 주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고, 부모에게 소개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음성메시지의 그녀도 은희였던 것이다. 은희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만났고 그는 나와의 관계를 다 정리했다고 그녀에게 거짓말했다.


 그를 끌고 그녀의 집으로 내려갔다. 셋이 앉아 말다툼을 벌이다 결국 은희는 홧김에 경찰을 불렀고 그는 체포되었다. 그녀는 경찰서 계단에 앉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며 울었다.

 최 모 씨는 처음 금전 사기로 신고받은 관할 경찰서로 이송되었지만 신고자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어이없게도 하루 만에 풀려났다.


 나는 왜 호구가 되었을까? 죽이네 살리네 욕하고 물어뜯으면서도 왜 미련한 짓을 끝내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까?

 인상이 아주 선해 보였던 그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사람들을 잘도 속였다. 순수함을 잃지 말라던 그의 말의 의미를 그제서 깨달은 나는 아주 쓰라린 경험을 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에게 당한 돈을 받아 내기 위해 은희와 여러모로 궁리를 해 보았지만 받아 낼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이름으로는 대출조차 불가했다. 이상한 셋의 조합이 오래 갈리 없었다. 은희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고 나는 그녀와 대판 싸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짐도 풀지 못한 상태 그대로였다. 가구는 모두 헐값에 팔아 버리고 간단한 것만 챙겨 시흥에 값싸고 작은 방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다 김 과장이 있는 건축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은희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최 모 씨가 계속 괴롭힌다는 것이다. 나도 나지만 그녀도 참 딱했다. 최 모 씨와의 인연을 끊지도 못하고 악연으로 맺어진 내게 하소연하려고 자꾸 전화를 건다. 나도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가끔 돈을 보내달라는 그의 전화를 받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살아 보려고 바다에 갔다.




 그동안의 일을 민수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온몸이 저려왔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일그러졌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범상치 않은 부모 밑에서 자라 기운을 느끼고 사주를 보며 미래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다.

 "헤어지라!"

 친구의 말에 민수는 한숨만 쉬었다.

 "와! 헤어지기 싫나?"

 "모르겄다."

 "와! 그리 많이 좋아하나?"

 "안 좋아하믄 니한테 물어보겄나!"

 "그래? 음...... 그럼... 같이 살아라!"

 "어???"

 "일단 동거부터 해라. 같이 살믄서 천천히 생각해 봐라! 글고, 얼굴 한번 보자캐라! 아가씨 관상 좀 보자."


 며칠 뒤 민수가 내게 말했다.

 "예전에 아는 누님이 구천만 원인가? 사기당했다는 소리를 들어봐서... 오천만 원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음... 같이 고민해 봅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사기당할 수도 있는 거니까. 세상에 나쁜 놈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도와줄게!"

 그의 따뜻한 말에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뭘 어떻게 도와줘요? 도와달라고 이야기한 거 아닌데?"

 과분한 사랑놀이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그는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이게 맞나?' 헤어지려고 털어놓은 건데 이 남자는 되려 같이 살자고 하니... 그것 까지도 감당하려는 그가 믿음직스럽고 고맙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동거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동거든 결혼이든 할 생각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헤어지자 말하니 자신의 확고함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끌고 엄마를 찾아갔다.


 민수의 존재도 몰랐던 엄마는 갑자기 찾아온 그를 보고 당황했지만 금세 얼굴이 굳어져 나를 밖으로 내 보냈다.

 "주희 너는 나가 있어!"

 "자네 이름이 뭔가?"

 "김민수입니다."

 "그려! 민수! 자네는 우리 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왔나?"

 "네! 알고 있습니다!"

 "빚이 오천만 원이나 있는디 다 안다고?"

 "네! 주희한테 다 들었습니다!"

 다 알고 왔다는 말에 엄마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허겄다는 건가?"

 "허락해 주시면 같이 살면서 갚아 나가겠습니다."

 "빚 갚는 게 쉬운 건 아닌디... 워떠케 갚는다고 그러나?"

 "둘이 벌어서 열심히 갚으면 몇 년이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천만 원이 주희 씨를 포기할 만큼 큰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후...... 우리 딸이 워디가 좋아서 그러나?"

 "다 좋습니다. 그 남자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것도 마음에 들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려...... 좋게 봐주서 고맙네."

 엄마는 보기 드문 사람이라며 민수를 마음에 들어 했고 동거를 허락했다.

 민수는 당장 그 남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했다. 연락처를 바꾸고 한가닥 남아있던 미련의 끈을 끊어버렸다.


 남자에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엄마와 언니와 형부는 최 모 씨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거나 목을 비틀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형부는 엄마에게 나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언니도 그렇지만 형부는 참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진 것이 없었던 엄마는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이천만 원을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나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도와주지도 못했다.

 공양미 삼백석에 딸년을 팔아먹은 아비라도 된 듯 이천만 원에 어미를 잡아먹는 죽일 년이 된 나는 가족들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엄마는 전화벨이 울리면 자주 놀랐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매일 가슴 조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 딸을 책임지고 같이 살아보겠다는 남자가 왔으니 눈물 나게 고마웠던 것이다.


 사랑해 주고, 이 죽일 놈의 신세에서 구해 주겠다는 그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모양새가 싫었다.




 - 작가의 말 -


 글을 쓰면서 자꾸 혼잣말을 합니다.

 "와~ 세다!!! 너무 세다!!"

 그래서 살짝 작가의 말을 남겨 봅니다.


 참 고민이 많았던 부분입니다. 남편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고 지인들도 모르는 이야기이다 보니 스스로도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살아온 세월에 워낙 풍파가 많아 얌전하고 조용한 글은 어려운가 봅니다. 그래도 진솔함의 힘을 믿기에 적당한 필터링을 거쳐 써 봤습니다.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


 먼저 쓴 글들과 퍼즐이 맞춰지는 부분들을 찾으신다면 당신은 찐 독자입니다~ ♡♡♡


 민수 씨는 이리 멋지게 나오는데 왜 이혼을 이야기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글은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죠? ^^  목차에 28편을 예고했으니 앞으로 갈 길이 멀었네요.  ˃◡˂ )


 워낙 슬픈 글을 많이 써왔던 터라 이번 글(이뻔소)은 재미나게 즐기며 쓰고 있답니다. (❁´▽`❁)

 독자 여러분들도 즐겨 주세요~ ^^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ღゝ◡╹)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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